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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방- 박서영

  • 기사입력 : 2014-01-0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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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대의 비닐하우스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자랄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고백과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나무의 혀들이 모래흙 밖으로 나와 있다.

    잎사귀가 축축 늘어져 있어 혀의 진실은 감춰져 있다.

    파파야와 바나나, 이런 이름표가 없었다면

    처음 만나는 우리가 악수를 할 수 있었겠는가.

    아직 자라지도 않았는데 익어버린 열매를 매달고

    너무나도 붉은 말을 혀 위에 올려놓은 사람.

    새순처럼 혀가 점점 길어진다.

    길어진 혀는 심장을 보여주려고 한다.

    나에게 도착하려고 계속 말을 걸어온다.

    열대(熱帶)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혀.

    우리는 가장 깊이 감춰둔 샅을 보여주려고

    길어지는 발설과 침묵으로 불타오른다.

    뜨거운 폐허가 열렸는데도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현대시학’ 2013년 7월호

    ☞ 시인은 몸 어디에다 이처럼 잘 익은 열정을 숨겨두었을까, 그녀가 말하면 말하지 못한 사랑도 빛나고, 악수하지 않아도 애인처럼 성큼 가까워졌어, 그러다 또 어느새 침묵으로 마음 감추어버리는 그녀 전생은, 자신의 시처럼 붉은 혀를 가진 불이나 차가운 입을 가진 얼음일지도 몰라, 모래 밖으로 혀 길게 내밀고 선 변덕스런 시라는 나무, 그 높은 가지 위를 기어이 올라가 바나나 파파야보다 맛 좋은 시들을 전리품처럼 바구니에 담고 서 있는 시인. 그녀를 만나면 말하고 싶네, 안녕 뜨거운 심장과 감추어둔 고백을 꺼내봐. 네 몸 꽁꽁 숨긴 열대의 비닐하우스 따위 쫙 찢어버리는 건 어때. 그 깊은 침묵과 뜨거운 폐허를 이제 아낌없이 열어봐 라고. 김혜연 시인

    ※ 이번 주부터는 1993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한 김혜연 시인이 시가 있는 간이역을 찾아갑니다. 김 시인은 여류작가의 작품을 소개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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