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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텃밭] (6) 오하룡 시인

내 사랑 남천, 너와의 추억은 詩가 되었다

  • 기사입력 : 2014-07-2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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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하룡 시인이 어릴 적 추억이 서려 있는 창원 남천 돌다리를 건너고 있다./김관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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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하룡 시인이 그의 문학 감성을 깨워줬던 창원 남천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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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시인이 성산패총을 둘러보며 소 먹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세월이 오래되었다. 그 시절 되돌아보니 벌써 60여년의 간극이 벌어져 있다. 아무리 장수 사회라 하지면 그런 간극 가운데도 이렇게 건강하게 추억의 한때를 이런 글로써 향유하게 되니 어찌 행운이 아니랴. 더욱이 이런 추억의 무대가 내 문학의 텃밭이 되었으니 더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유소년 시절은 우리나라의 건국 초기인 데다 한국동란이란 국가적으로 어려운 격변기를 지내느라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든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회상하니 그 시절이 아쉽고 그립기만 하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나는 그 시절 창원군 웅남면 외동리 성산(지금의 성산패총 유적지 근처)이란 마을에 삶의 둥지를 틀고 세상을 향해 서툰 첫걸음을 떼었다. 원고향은 경북 구미이나 구미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으니 아무래도 의식의 초보적인 각성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을 때, 나로서는 안남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그 시초를 열게 된 게 아닌가 한다. 그 무렵 어린 나에게는 농촌의 일원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임무가 자연스럽게 부여되고 있었다.


    처음 부딪쳤던 일은 아침에 일어나 꼭 개똥을 한 소쿠리 주워 와야 하는 것이었다. 어린 나에겐 벅차기도 하거니와 참 하기 싫은 일이었다. 개똥은 아무데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들판 논둑길을 헤맸다가는 빈 소쿠리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차츰 요령을 터득하고 개는 마을 근처를 돌면서 변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서서히 소정의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

    겨울에는 개똥이 얼어서 줍기 좋으나 여름에는 묽은 똥이 많아 그 냄새와 함께 그 물컹거리는 것이 너무 싫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농촌에 살면 거름을 확보하는 한 수단으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란 걸 아는 데는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학년이 좀 올라서는 소 풀 먹이는 일이 필수 임무가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소를 몰고 산이나 천변으로 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가까운 산으로 가는 것이다. 그때 소를 먹이는 장소로는 지금 성산패총으로 유명한 성산동메 야산을 많이 이용했다.

    우리는 그 산에 올라 소를 그냥 놓아두거나 아니면 이 나무에 한참 묶어놓았다가 그 나무 아래 풀을 소가 다 베어 먹고 나면 다시 이동해 다른 나무에 소를 매어두는 방법을 반복했다. 동네 소가 이 산에 다 모이므로 넓게 보이는 그 산의 풀밭도 얼마 되지 않아 먹일 풀이 없어졌다. 우리는 새로운 소먹이 풀을 찾아 소를 몰고 남천 변으로 간다. 그때 우리는 남천을 ‘남천 내’라고 불렀다. 남천이라면 되었는데 왜 내라는 말을 더 붙였는지는 모른다. 어른들이 그렇게 썼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 썼던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은 남천 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그때 사람들은 구전으로 전래되는 이름을 그대로 쓰다 보니 그렇게 잘못 불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때 남천 변에는 버드나무 숲이 좋았다. 버드나무가 성기게 선 곳도 좀 있어서 더 촘촘했으면 싶을 때도 있었으나, 어떤 곳은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그 숲에 들어서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한낮 소를 천변에 풀어놓고 그 버드나무 그늘 밑 모래밭에서 땅따먹기를 하거나 살구 받기 혹은 때기 치기 놀이를 잘했다. 이런 놀이가 시들해지면 왜 그리 졸음이 오던지.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고 졸 수가 없었다. 소는 잠시라도 우리가 한눈을 팔면 근처 밭의 콩잎을 절단 내거나 나락을 싹둑싹둑 잘라 먹기 때문에 항시 지키고 있거나 아니면 고삐를 잡고 따라 다녀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지 않고 동심의 천연성을 즐길 줄 알았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소를 버드나무에 묶어놓고 훌훌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든다. 물론 수영복이 있을 수 없으니 알몸인 상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서로 의논이나 한 것처럼 너나없이 소를 나무에 묶어놓고 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때 남천 물은 얼마나 맑고 깨끗하던가. 나는 요즘도 산천어가 사는 일급수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때의 남천을 생각하고는 그리움에 젖는다.

    우리가 있던 자리에서 한참 위쪽으로 가면 미끄럼타기 좋은 바위가 있었다. 바위가 미끄럼타기 좋게끔 크고 넓기도 했지만 하도 아이들이 타고 놀아서 반짝거릴 정도로 윤이 났다. 그곳은 지금 성산패총의 남쪽 산허리에 있던 새 터라는 마을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서 놀면 어찌 그리 시간이 빨리 가던지. 몇 시간을 그렇게 세상 모르게 놀다가 집에 늦게 돌아가는 통에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때로 우리는 헤엄치다 지치면 은어 잡이에 나선다. 떼 지어 움직이는 은어 떼 위에 막대를 때리면 그 울림으로 은어 몇 마리가 잠시 혼절해 뜨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놀이로 즐겼던 것이다.

    그때는 비만 많이 오면 천변이 넘쳐 논밭이 휩쓸리는 피해가 있었다. 안남초등학교는 장복산 아래 자리 잡고 있어 우리 마을에서는 10리가 넘는 거리였다. 거기다 남천을 건너 다녀야 했으므로 비가 많이 온 후에는 냇물이 무섭게 흘러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임시 가설 나무다리를 건너다니다가 이 다리가 쓸려 가버려 멀리 야촌대교로 20여 리를 돌아 학교에 다니기도 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방천이 든든하게 쌓여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염원의 실현으로 창원공단이 들어서고 오늘날과 같은 튼튼한 둑이 쌓여지고 그 둑 위에는 양쪽으로 시원하게 한쪽은 6차선, 한쪽은 2차선 넓은 길이 달리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제 여기에는 예전처럼 아무렇게나 띄엄띄엄 숲이 되어 서있는 버드나무가 아니라 낯선 수종의 가로수가 질서를 뽐내면서 줄지어 서 있다. 남천에 대한 사랑은 다음 작품이 잘 얘기하고 있다.



    남천에게

    내가 아는 너는 나무랄 데 없는 미녀이다/이목구비 수려한 팔등신 어떤 사내이건/마음 흔들어놓는 그 빼어나디 빼어난 내 사랑이다/그러나 너도 시집은 가야 할 운명/바라노니 나무랄 데 없이 잘 어울리는 한 쌍/너의 미모에 손색없는 참으로 잘 생긴 낭군과의/해로이어야 하리 어디서건 무엇으로 만나건/여전히 아름다운 미로로서 내 앞에 서야 하리/턱도 없는 서글픈 환상이여

    -시집 <창원별곡>에서 전재



    이 남천이 내 문학의 밑천이 되어 내 저서, 여남은 권의 시집 중 많은 부분이 씌어졌다. 시집 제목에서 풍기듯이 첫 시집 <모향(母鄕)>, 두 번째 시집 <잡초의 생각으로도>, 세 번째 시집 <별향(別鄕)>, 다섯 번째 시집 <창원별곡> 등이 모두 남천을 중심으로 옛 농촌 창원이 오늘날 도시 중의 도시 창원시로 변모하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오하룡 약력> △1940년 일본 출생, △구미, 창원, 부산 등지에서 성장 △1964년 시동인지 <잉여촌> 창간동인으로 활동, 1975년 시집 ‘모향(母鄕)’으로 등단 △시집 ‘잡초의 생각으로도’, ‘별향’ 등 △경남문인협회, 경남아동학회 이사


    <김관수 약력> △1956년 고성 출생 △개인전 15회 △경남사진학술연구원 원장, 대구예술대 사진영상과 겸임교수, 경남국제사진페스티벌 운영위원장, 한국사진학회 이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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