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산꼭대기를 감싸 안고 있다
아직도 눈부시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저 꼭대기에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날아가는 황조 한 마리
느낌이 때로 일생일 때가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밥을 안친다
쉬릭 쉬릭, 밥솥의 추가 돌기 시작한다
가을을 무르익히고 나온 당찬 쌀알들
그리움이 많은 것처럼 서로 모여 할 말도 많다
한 알이 운을 띄우자 막 발차하는 기차처럼
퍼블퍼블 말 잇기를 하는 저 입들
터져 나오는 말들이 청동의 풀물빛 감아
뿌연 수증기를 타고 말 갈퀴를 날린다
하늘은 문을 닫으려 하고
말들은 튀어 오르고 싶다
숨통을 조이듯 조이듯
일발을 받아 푸는 목숨 추
그들은 지금 지심의 중추를 돌리는 중이다
솥은 잠시 그들 좌담고를 빌려주는 것뿐인데
말들이 신랄하게 뿜어내는 거품에
가슴으로부터 열이 차 오르는 것은
증발하는 열차의 속내가 내 속에서도 날고 있기 때문인가
기차를 태운 노을이 산꼭대기를 넘는다
☞ 기차는 왠지 그리운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할 것만 같은 추억 같다. 영화 속에는 늘 긴 기적과 연기만이 버려지는 플랫폼에서 뜨겁게 이별하는 연인이 있다. 변화 없이 밥솥에 밥 안치던 일상에서 이유 없이 이탈하고 싶어진 그녀에게, 얌전하게 갇혀 있던 속내가 퍼블퍼블 설익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갈퀴를 달고 열이 차고 막 발차하는 마지막 기차처럼, 황급히 출발을 서두르며 조용하던 마음 재촉하기 시작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말 잇기를 해대는 얄미운 입들을 모두 싣는다. 아무도 부르지 않지만 아직도 눈부신 목적지 향해 시인이 혼자서 묵묵히 표를 끊는 동안, 고맙게도 숨죽이고 있던 밥솥의 추가 예정대로 돌기 시작한다. 김혜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