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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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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 홍승자 씨

“10살 때 들은 아쟁소리에 끌려 ‘소리꾼’ 길 들어섰죠”
전남 강진서 악극단의 슬픈 아쟁소리가 가슴에 와닿아
가난으로 좌절됐지만 소리 꿈 못 버리고 30살 늦깎이로 시작

  • 기사입력 : 2014-11-1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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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는 하루아침에 그 소리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피를 토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오랜 세월 단련시켜야 소리꾼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김해에서 우리 소리를 전승하고 있는 홍승자(50)씨. 그는 스스로를 소리꾼이라고 부른다. 묵은지처럼 정감이 가고 깊은 맛이 감돌기 때문이란다.

    그는 무형문화재 제14호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 가야가락예술단 단장, 홍승자 판소리 연구소를 맡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기도 하고 평생교육원에서 판소리와 민요를 가르친다.

    ◆어릴 때 들은 아쟁소리에=?그는 전라도 여수댁이지만 전라도 강진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초등학교 3학년 10살 때 가세가 기울어 부모의 고향인 강진으로 이사, 평생 잊지 못할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아주 슬픈 소리가 울려퍼졌어요. 뭔가 홀린 듯 정신없이 그곳으로 향했고, 그때 들었던 아쟁소리가 얼마나 아프던지요….”

    약장사가 마을에 가설극장을 차리고 악극단 공연을 하던 시절이었다. 가난으로 찌들었던 당시의 상황이 슬픔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더 아프게 와닿았고, 징소리도 진한 울림이 있었다고 한다. 국악 인생의 첫발인 셈이었다.

    “마침 악극단의 주인공이 저의 옆집에 묵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에게서 소리를 배우게 됐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극단을 따라갈 뻔도 했었죠.”

    하지만 그 시절은 소리를 배우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때. 어머니에게 호되게 매를 맞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난의 멍울 속에서 중학교까지만 졸업하고 동생들을 돌보면서 몇 년을 보냈다.

    ◆소리의 꿈 버리지 못하고=?그는 우연한 기회에 마산 한일합섬에서 일도 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는 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8살 때 홀로 마산으로 와 3년간 한일여고를 다녔다. 그 후 한일합섬 기술연구소에서 6년간 근무했다. 어릴 때 배웠던 소리를 놓지 못했던 그는 마산 실내체육관에서 판소리 오정숙 명창의 공연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명창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그는 그곳에 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10살 때의 그 ‘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워보겠다고 나섰지만 인근에서는 소리를 하는 스승을 찾지 못했다.

    이래저래 소리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민요 정도 흥얼거리게 된 수준 정도밖에는 오를 수 없었다.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또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

    ◆명창을 만나다=?“꿈을 버리지 않으면 늘 살아가면서 기회를 얻을 수 있고, 또 그 기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의 나이 30살 때 광주의 명창 이임례 선생이 창원에 공연을 왔다. 그도 이 공연의 민요무대에 섰고, 뒤풀이 장소에서 명창을 만나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 청했고, 1994년부터 광주를 찾아갔다. 주말마다 6살 딸을 데리고 3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광주에 갔다. 30살 늦깎이로 출발하는 데다가 가족을 돌봐야 하는 자신의 주변환경도 소리를 배우기에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0여년 노력 끝에 2005년 무형문화재 제14호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로 지정받았다.

    “그때 이수증을 받고 선생님께 큰절을 올리고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고생 끝에 낙이 오고 너는 마음이 천심이니 걱정할 필요 없이 잘 살 것이다’고 덕담을 해주셨죠.”

    그의 딸(장지현·25)도 같이 소리를 배우면서 국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 가야금 병창을 전공하고 있으며 전남대 국악과에 재학 중이다. 남편 장용호(51)씨도 예술가로서 삶을 살고 있다. 김해공예협회 회장, 한국미협 이사, 국전 심사위원 등 목공예가이다.

    ◆피를 토하며 소리 익혀=?광주 원정 소리 배움의 길은 험난했다. 여름·겨울방학 한 달씩 산공부(산으로 들어가 소리를 배우는 과정)를 하는데 1인당 100만원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딸 강습비만 내고 자신은 같이 공부하는 30여명 학생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틈틈이 소리를 익혔다.

    학생들의 빠르고 정확한 음감을 따라잡기 힘들었고, 습득하는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렸다. 그만큼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성대는 타고나지 않아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때까지 수십 배의 고통이 뒤따랐다. 성대의 실핏줄이 계속 터져 아침마다 목에서 피가 올라올 정도였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늘 쉬어 있다.

    더 힘든 건 가난이었다. “이걸 해서 내가 돈을 벌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해야지 회의도 많았습니다. 근데 스승님은 ‘자네는 운명적으로 이 길을 가야 할 사람이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옛날 이야기를 할 날이 올 것이다’며 격려를 해줬죠. 그만두려는 나를 잡아줬습니다.”

    2005년 이수증을 받고도 2009년까지 주말 원정 배움의 길을 이어갔다.

    ◆국악 전승자로서=?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2000년부터 초중고 국악강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부터 김해에서 판소리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홍승자 국악예술단(현 가야가락예술단)을 만들어 제자도 양성했다. 20여년간 김해에서 판소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제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 이승민 학생은 2014년 전주대사습 일반부 장원을 차지했다.

    그는 늦었지만 지난 2009년 전남 강진 성화대학 실용음악과를 졸업했다. 또 원광디지털 대학(전통연희학과) 3학년에 편입해 온라인으로 공부를 하고 방학 때 학점 이수를 마쳐 2013년 2월 졸업했다.

    ◆국악 일부 장르 편중 아쉬워=?“국악 교육자 입장에서 보면 경남은 사물놀이에 관심도가 편중돼 있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도 경남만의 기이한 현상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도교육청 국악경연대회가 사물놀이 부문만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다른 분야를 배우는 학생들은 교육청 경연대회에 나갈 수 없으며 그 여파로 학교에서도 사물놀이 강사만 원한다는 것이다.

    그는 “판소리는 민족의 한과 희로애락이 담긴 민중의 소리이며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녹아 있는 끌림의 소리인데 외면을 받고 있어 아쉽다”며 “우리 것이 좋은 것인데, 국악은 경쟁력 있는 음악이다”며 북을 치며 소리를 시작했다. 글·사진=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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