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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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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남해 양모리학교 마태용 교장

병마 이겨내고 희망 품은 ‘행복한 양치기’

  • 기사입력 : 2015-01-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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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군 설천면 양모리학교에서 마태용 교장이 양을 안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메~~’ 하고 부르니, 10여 마리 양떼가 산비탈을 달려 내려왔다. 마태용(47)씨가 바구니에서 배추 잎을 꺼내주니, 양들은 ‘쩝쩝’ 소리까지 내며 받아먹었다.

    한참 ‘아빠 미소’를 띠며 양들을 바라보던 마씨가 허리를 펴고, 산비탈길 아래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래 걸렸어요.”

    투병 중이던 그에게 양들은 희망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15년 을미(乙未)년 양띠 해를 맞아 양을 키우는 ‘남해 양모리학교’ 마태용 교장을 만났다.

    ◆크론병과 목양견

    22년 전, 마씨는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다. 강원도의 한 우체국에 취직한 지 불과 2개월 만의 일이었다. 동네 병원에서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고 했고 장염이라고도 했지만, 잘 낫지 않아서 찾아간 큰 병원에서 뜻밖의 병명을 얻었다. 크론병은 식도·위·소장·대장과 항문까지 위장기관 모든 부위에 원인불명의 염증이 발생하는 희귀 난치성 질환이다. 마씨는 4~5년간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염증이 심해 인공 장기까지 부착할 정도였다.

    입·퇴원을 반복하던 32살 무렵, 마씨는 생계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자서 할 일을 찾아야 했죠. 출퇴근 시간에 맞춘 회사생활을 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마씨는 인터넷에서 개를 분양받아 키우는 일을 발견했다. 혼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씨는 “이왕이면 양몰이 개를 키워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개를 키우는 것보다는 전문적이고, 장기적으로 일을 하려는 의지도 있었고요”라고 덧붙였다.

    국내에는 없는 종 보드콜리(목양견)가 미국에서 분양돼 왔다. 물 건너온 물건(?)이었다. 늑대를 비롯한 육식동물과는 달리 보드콜리 같은 목양견은 대상을 추적하되 결코 물거나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상당한 자제력이 있고, 인간의 단어 200개 이상을 익힐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마씨는 회상했다. 그는 “당시 국내에는 흔치 않은 종이었기 때문에, 영문 이메일을 작성해서 보내고 검역을 통과하고…. 어렵사리 분양받았어요”라며 “그런데 훈련을 해봤어야죠. 데려와서가 더 문제였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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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을 쫓는 모험

    양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목양견을 데려온 뒤 4년 후의 일이었다. 건강도 많이 나아졌을 때였다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비탈진 밭 약 2500㎡를 빌려 양 5마리로 훈련을 시작했다. 마씨는 “지금보다 작고 형편없었죠. 양을 승합차에 태워서 경기도 구리시 한 강변에서 훈련을 한 적도 있었으니…”라고 회고했다. 덩치가 크고 다루기 어려운 양을 대신해 먼저 오리를 몰아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마씨가 이번에는 잘 훈련된 보드콜리를 영국에서 데려왔다. 개를 훈련시켜 양몰이를 하는 대신, 훈련을 잘 받은 개에게 마씨가 배우게 된 것이다. 양몰이에 점차 익숙해지자 비탈밭 공간이 좁게 느껴졌다.

    마씨는 “공간도 좁고 양도 적다고 느끼게 됐죠. 당시에 체험학습장이라는 게 사회적으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할 때여서 양이 있는 농장을 찾아다니며 ‘방문객들에게 양몰이를 보여주는 게 어떠냐?’고 농장주들을 설득했어요”라고 했다.

    이번에도 쉽지는 않았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등지를 찾아 가보고 전화로도 설득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단 한 곳만 빼고. 마씨는 “강원도 대관령의 한 체험장이었어요. 거기는 치즈도 만들고, 눈썰매도 타는 곳이었는데, 양몰이 제안을 받아줬어요. 정말 고마웠죠”라고 말했다.

    마씨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양을 쫓기 시작했다. 마씨는 이곳에서 4년, 충남 당진 농장에서 2년을 일했다. 그리고 대관령으로 돌아와 다시 2년간 농장에서 일했다. 그는 “마지막에 일했던 대관령 농장은 양이 150~200마리 정도 있어서 훈련에 도움이 많이 됐죠”라고 했다.

    ◆남해 양모리학교

    마씨는 지난 2011년 4월 남해에 자리를 잡았다.

    기자가 왜 ‘양모리학교’인지 묻자, 마씨는 “원래는 양몰이학교로 하려고 했는데, ‘양몰이’는 벌써 누가 쓰고 있더라고요”하고 겸연쩍게 웃었다. 체험농장은 1년 정도 준비기간을 거쳐 2012년 5월께 문을 열었다. 처음에 양 10마리에서 시작한 것이 지금은 40마리 정도라고 한다. 마씨는 “양이 새끼를 낳는 대로 키우기에는 공간이나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요. 매년 4월경에 새끼를 낳으면 팔 수밖에 없어요”라고 했다.

    양모리학교라는 이름처럼 체험학습 중심은 양이지만, 이곳에는 다른 가축들도 키운다. 미니돼지 8마리, 당나귀 1마리, 토끼 30마리, 오리 9마리, 닭 20마리 등이다. 이들과 함께 3만6300㎡ 규모의 농장은 마씨와 그의 노부모 셋이서 함께 운영한다. 마씨는 “젊을 때 아팠던 탓에 아직 미혼이네요. 젊은 사람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을 부모님은 묵묵히 도와주세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건강까지 회복하는 모습을 보는 걸로 만족하시는데 감사할 따름이죠”라고 말했다.

    마씨는 1년 내내 농장을 방문객들에게 열어둔다. 덕분에 하루 평균 10~20명, 주말에는 하루 평균 100명, 성수기에는 400~500명이 찾는 곳이 됐다.

    그런 마씨도 2년 뒤면 이곳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는 “농장 임대기간이 2년 정도 남았어요. 어쩌면 다른 곳을 찾아야 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고향(거창군) 인근에서 목장을 계속하면 좋겠죠”라고 말했다.

    크론병은 완치되는 병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양과 목장견을 아끼는 모습에서, 그가 농장을 운영하는 한 건강을 지금처럼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치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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