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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02) 고성 (12) 대가면 양화마을~고성읍 남산공원

봉긋봉긋 솟은 그곳엔 1500년 전 소가야 숨결이…

  • 기사입력 : 2015-03-1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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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119호로 지정된 고성 송학동 고분군.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무덤 방을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양화마을 어귀 느티나무엔
    마을의 수호신 역할 해주던
    서낭당과 막돌탑 남아 있다


    겨울철새 노니는 대가저수지
    1932년 일제강점기 때 축조돼
    우리 민족의 피와 땀 서려 있다


    무기산 뻗어 나간 능선 주변
    사적 제119호로 지정된
    7기의 송학동 고분군 모여 있다


    고성 유물 전시된 박물관 지나
    남산공원 입구에 다다르면
    30여기 빗돌 줄지어 서 있다


    음력으로 새해를 상징하는 입춘의 절기가 지난 것도 한참이다. 옛날부터 입춘이 오면 새봄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는 노란 복수초가 얼음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에서 봄이 오고 있음을 느꼈다. 자연은 위대하다고 말한다. 자연의 재앙 앞에서는 자연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지난 1월 우리나라보다 3배 큰 국토를 가진 미얀마에 자연을 닮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녀왔다.

    국민소득이 낮아 가난한 나라이지만 여행 내내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며 싸움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화려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잘 먹고 비싼 옷 입고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미소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마음속에 담아 왔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서 또 다른 나를 돌아보며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만나는 기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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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저수지.

    양화마을 서낭당·대가저수지

    천왕산 자락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양화마을은 북쪽이 막혀 있고 남쪽이 열려 있어 명당이다. 양화마을 남종현(69) 이장은 요즘 부쩍 도회지 사람들이 귀촌을 위해 땅을 사려는 발길이 잦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천왕산 골짜기에서 땅을 다듬는 중장비 소리가 들려온다. 자연을 거스르는 난개발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개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귀촌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은 주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집터나 집의 규모는 절대 크지 않아야 하고 주변과 잘 어울려야 한다. 귀촌해서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어야 하고 다른 가족의 독립성(프라이버시)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병원이나 편의시설 등과의 거리도 고려해야 한다. 귀촌에 성공하려면 무조건 이사를 하는 것보다 일정 기간 지내면서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3년 이내에 집을 판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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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마을 느티나무 밑 서낭당.


    양화마을 입구에는 수령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 3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정자나무 밑”이라 부르고 있었다. 느티나무 밑에는 서낭당 제단과 막돌탑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날 새벽 주민들이 동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인근 대무량사 절에서 지내고 있다. 느티나무는 평소에는 천왕산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이다. 지난여름 천왕산을 등산하고 정자나무 그늘에서 맥주를 한잔 하며 쉬어갔던 추억이 있다.

    서낭당의 유래는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돌을 쌓아놓은 것이 보편적이었다. 서낭당은 마을을 보호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마을을 보호해주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막돌탑을 쌓고 섬기는 우리와 비슷한 풍습은 몽골이나 티베트, 네팔 같은 나라에도 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서낭당이 있었는데 1960년대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 미신이라 해서 없어졌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유산의 하나인 서낭당과 막돌탑이 허물어져 없어지기 전에 근본적인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

    물이 가득한 양화저수지의 잔잔한 물결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는 모습이 매우 포근하다. 서둘러 일어나 길을 나서는데 양화마을 앞 양지바른 밭두렁에 봄을 재촉하는 광대나물(일명 코딱지 풀)의 분홍빛 꽃이 꽃말처럼 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양화마을에서 산비탈 따라 작은 고개를 넘으면 넓은 대가저수지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지금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철새들이 노니는 곳이지만 대가면 유흥리 일원에 있는 대가저수지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일제강점기 1931년 6월 1일 착공해 1932년 5월 31일 준공한 것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태평양전쟁에 대비, 식량 증산을 목적으로 축조했다.

    대가저수지는 지역주민들이 지게와 레일을 이용해 축조했으며, 나라 잃은 농민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제방에는 공적비가 있고 면적 943.5㏊, 저수량 485만5600t, 높이 14.5m, 길이 345m로 고성평야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한가롭게 먹이를 찾는 철새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고성읍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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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박물관에 소장된 조문청동기.


    송학동 고분군·고성박물관


    대가저수지가 적셔주는 고성평야를 지나면 사적 제119호 고성 송학동 고분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은 무기산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능선 주변에 있는 7기의 가야시대 고분군이다. 가장 높은 곳에 1호의 고분이 있고 점차 밑으로 내려가면서 나머지 6기의 무덤들이 있다. 1호 고분은 고성을 지배했던 우두머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전방후원형으로 보인다고 했으나, 발굴조사 결과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무덤 방을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머지 6기의 무덤은 1호 고분을 보호하는 딸린무덤(배총)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1호 무덤은 좋은 위치와 무덤의 규모 등을 생각했을 때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후 400년을 중심으로 앞뒤 50년의 범위를 넘지 않을 것이다. 송학동 고분이 있는 무기산은 산으로 부르기에는 아주 작지만 고성의 역사에는 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똥메산(독뫼산)으로 불렀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큰 무덤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

    고분군은 관리나 정리가 잘돼 있어 주민들의 좋은 휴식 장소가 되고 있다. 고분군 주변에 주차장이 있고 걸을 수 있는 오솔길과 운동기구도 여럿 갖춰져 있다.

    고성도서관 부근 도로변에도 고분 1기가 민가 사이에 있는데 송학동 고분의 일부로 여겨졌다. 옛날 사람들은 고분도 문화유산으로 남겨줬는데,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무덤을 후손들에게 무엇으로 남겨줄까? 송학동 고분군의 역사적 사실이 소가야시대로 밝혀졌다면 고분군 이름을 소가야 고분군으로 변경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송학동 고분군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토기그릇 형태를 디자인한 고성박물관이 있다. 고성박물관은 고성지역에서 발굴되고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공간이 없어 2012년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박물관 1동으로 개관했다. 상설전시관, 미술전시실, 기획전시실로 이뤄져 있다. 고성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모조품이 전시돼 있다.

    자원봉사를 하는 강미혜(55)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고성읍 동외리 패총에서 발굴된 조문(새 무늬)청동기이다. 조문청동기에는 마주 보는 새 2마리를 전면에 배치하고 그 주위로 작은 새 40마리와 나뭇잎 모양의 무늬를 깔아놓은 구도이다. 고성에 독수리 월동지가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박물관에 전시하는 유물이 모조품이거나 복사품이면 반드시 사실을 표기해야 한다.

    그것이 진품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아오는 관람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역사정보실에는 공룡 이후 인류 문명의 시작에서부터 소가야의 성립, 해상왕국 소가야, 소가야의 고분, 소가야 이후 고성의 역사가 알기 쉽게 정리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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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 빗돌.


    남산공원·남산 빗돌들


    고성읍내를 가로질러 군민들의 허파 같은 역할을 한다는 남산공원으로 향했다. 옛 문헌 고성지에 따르면 “남산은 무량산으로부터 와서 동으로 휘돌아 고성현의 치소(행정사무를 맡아보는 기관)가 됐으며 또 남으로 휘돌아 이 산이 됐다”고 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고향 초등학교 동창회에 왔다는 사람들에게 남산의 의미를 물었더니 이름부터가 정겹다고 했다. 흔히 남산은 왕조가 있던 곳에서 부르던 산 이름이다.

    고성사람들은 옛날 고성을 고자국, 소가야로 불리던 시절부터 지배계급이 터 잡고 살았던 왕조의 고장이라는 긍지가 있다. 남산공원으로 가는 초입에 줄잡아 30여 기의 각종 비들이 도열하듯 줄지어 있다. 빗돌에는 벼슬아치들의 선정비, 영세불망비, 거사비, 휼애비, 유혜비 등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옛 동헌 주변에 있던 비석들이 주변 개발로 돌보는 이 없이 빗물에 씻기고 바람에 넘어져 버려져 있던 것을 한자리에 옮겨 세운다 하는 행적을 기록한 비석을 보면서 공적이나 성과에만 치중하는 공직자들의 교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심재근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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