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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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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대기업서 20년간 임원 지낸 김덕수씨

“열심히 일하면 오래 일한다, 직접 증명하고 싶었죠”
효성 창원공장 조성 초기단계부터 함께해
이사·상무 등 거쳐 공장장으로 12년간 재직

  • 기사입력 : 2015-03-1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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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수 효성 창원공장 전 부사장이 한국산업단지공단 동남지역본부 로비에서 창원공단 항공사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모든 월급쟁이들의 ‘꿈’인 대기업의 임원을 다는 것을 흔히 ‘하늘의 별’에 비유한다. 부장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각종 혜택을 받지만,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협회가 2012년 전국 25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졸 신입사원이 임원이 되는 데는 평균 21.2년이 걸렸다. 임원이 될 확률은 0.8%로 100명이 입사를 해도 채 1명이 안 된다. 하지만 전체 임원의 3분의 1 정도가 승진한 지 2년을 못 넘기고 물러나는 게 현실이다.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하고, 불황 시에는 구조조정 1순위로 꼽힌다. 때문에 임원은 ‘임시직원’의 줄임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런 가운데 창원공단 내 대기업에 39년 근무하면서 공장장으로 12년간 일하다가 최근 퇴임한 사람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03년 효성 창원공장 총괄공장장이 된 후 지난 1월 퇴임한 김덕수(65) 전 부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효성 창원공장은 71만8327㎡ 규모로 창원산단 내 위치하고 있고 국내에서 변압기, 차단기 등 중전기기(중량이 큰 전기시설물)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회사다.

    김 전 부사장은 지난 1976년 7월 효성에 입사한 후 이듬해 창원공단에 중전기기와 관련된 공장이 건립되면서 서울에서 왔다. 창원이 고향(마산합포구 진전면)인 데다 대학 전공(전기공학과)이 직접 관련이 있어 자원한 것이다.

    당시 창원공단은 조성 초기 단계였고, 이곳으로 내려온 그는 창원공장 건설본부에서 공장 설립 기획부터 건설 과정까지 함께했다. 이후 그는 대리, 과장 등 승진을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부장 5년을 채우고 46세가 되던 1996년 입사 19년여 만에 임원(이사 대우)이 됐다. “부장 5년 하면 임원 자격은 있지만 대개 7~8년 만에 달았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 발탁 승진이란 논란도 있었습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이사 대우 승진 후 각각 3년 만에 이사와 상무를 거쳐 전무를 달고 4년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해 6년간 근무했다. 총괄공장장은 상무 2년차인 2003년(53세)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전체 직장생활 만 39년 중 공장장 12년을 포함해 임원만 20년을 한 셈이다.

    총괄공장장 발탁과 관련, 그는 당시 여러 선배들도 있었지만 1997~1998년 IMF 당시 자신이 맡았던 사업 분야(차단기)가 매출 신장이 가장 두드러지고 이익도 많았기 때문으로 자평했다. 그는 역대 공장장들이 대부분 3년을 임기로 했기 때문에 자신도 회사생활을 더 오래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의 우려와 달리 공장 책임자를 오래 한 비결에 대해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려고 했던 것이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면 이슈화해서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자세를 가졌죠.” 이 과정에서 그는 ‘5why’분석이나 환경분석 등을 통해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해서 추진하려고 했다고 한다.

    공장장으로 장수한 또 다른 이유로 회사에서 엔지니어 위상을 높이기 위해 롤 모델케이스로 만들려고 한 것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나이 많을 때까지 공장장을 맡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라도 열심히 일하면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장수한 데는 자신이 제시하는 이유보다 공장장으로 성과가 더 큰 요인이 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실제로 그는 총괄공장장 취임 당시 6000억원이던 매출을 2조원 정도로, 10%에 불과 했던 수출을 50%로, 1600명이던 정식 종업원을 2600명으로 끌어 올리는 큰 성과를 내면서 효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근무기간 가장 큰 보람은 취임 2년 후 생산하는 전 제품이 흑자를 냈을 때입니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765kV 초고압변압기와 초고압개폐기를 생산해서 세계에서 2번째와 3번째로 수출해서 기술력과 품질을 인정받았을 때입니다. 이를 계기로 효성 중전기기 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름이 알려져 입찰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글로벌 기업이 된 거죠.”

    어려웠던 일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노사 간 신뢰 형성이 가장 어려웠던 일로 꼽았다. 사측은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원칙을 준수하려 하지만 노조는 그 이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간 갈등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는 사측이 노조의 신뢰를 얻고 상생협력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서로 불신으로 인한 것으로 그는 분석했다. 때문에 그는 가능한 한 노조를 신뢰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해주겠다는 확신을 심어주려 했다. 즉 회사 역량(여건)을 보고 안 되면 안 되고, 되면 된다는 확실한 원칙을 준수했다고 강조한다. 노-노라인 갈등도 어려웠는데 적극적인 중개 역할이 필요했다고 한다.

    직장인들에 조언도 잊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를 위해선 성취감을 맛봐야 하고 성취감을 느끼려면 도전 목표를 정하고 그에 대한 많은 창의적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목표를 성취하면 다음 도전 목표를 정하는 등 이런 사이클을 통해 살다 보면 그 과정에서 자체 평가와 개선 등을 통해 이상적인 자신의 삶이 형성됩니다”고 그는 말했다.

    또 “도전 목표는 어떤 작은 분야라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장기적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에 무엇이 되기 위해선 5년 후까지는 무엇을 하고, 5년 후에 무엇이 되기 위해 올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매년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합니다. 자신이 만족하는 수준까지 도전적 목표를 정하고 노력을 하면 그만큼 성숙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효성맨으로 소회에 대해 그는 “내 직장으로 40년을 생활했고 보람 있게 보냈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제2막 인생에 대한 계획은 못 잡았습니다. 6개월 정도 쉬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방향인지 생각해서 정할 계획입니다. 다만 내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 활동하는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명용 기자 mylee@knnews.co.kr


    약력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출생(1951년) △부산동래고·부산대 전기공학과 졸업 △1976년 효성 입사, 1996년 이사 대우, 1999년 이사, 2002년 상무, 2005년 전무, 2009년 부사장, 2015년 1월 퇴임. 상무 2년차부터 총괄공장장 맡음 △대한민국 100대 기술(765kV초고압송전기)과 주역 선정(2010년), 창원상공대상(2010년), 제38회 상공의날 동탑훈장(2011년) △경남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창원상의 부회장, 한국전기협회 경남지회장, 창원공장장협의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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