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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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14) 산청 (3) 금서면 왕산·필봉산~지리산 오지 오봉마을

발길 닿는 곳마다 사람과 이야기와 절경이…
산청 동의보감촌 품은 필봉산

  • 기사입력 : 2016-03-0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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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칩이 지났으니 완연한 봄이다. 경칩은 글자 그대로 땅속에 들어가서 동면을 하던 동물들이 깨어나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경칩에 농기구를 정비하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다. 농업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근본으로 장려하고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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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의 모습이 붓끝을 닮은 필봉산. 조선시대부터 필봉산이 보이는 주변에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농업으로 생산된 곡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급격한 산업화, 공업화에 밀려 나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황금천하지대본’이라고 한다. 모든 게 돈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세상이다.
     
    사람 사는 이치와 근본을 익히고 가르쳐야 나라의 토대가 올곧게 선다.
     
    삶의 근본인 농업을 살려서 먹거리는 마음 놓고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내 작은 오두막이 있는 한절골에도 봄을 재촉하는 매화, 봄까치꽃, 광대나물의 꽃바람 속에 농사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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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촌희생자묘비.


    ▲ 왕산·필봉산

    왕산(해발 923m)과 필봉산(해발 848m)은 산청의 동의보감촌을 품안에 포근히 감싸고 있다. 산청이 선비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진산이다. 왕산 자락에는 전설로 전해오는 돌무더기 구형왕릉과 김유신이 활을 쏘던 자리가 있다. 허준의 스승 류의태가 한약 제조에 사용했다고 하는 약수터도 있다. 류의태 약수터에서 약 1.1km 지점에 고려 말 선비 농은 민안부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산 중턱 바위에 올라 송경(고려의 수도)을 향해 절을 했다. 후세 사람들이 민안부의 충절과 절개를 기려 이 바위를 만경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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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함양사건 추모비.


    능선을 따라 봄바람을 맞으며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면 화강암이 솟아 있는 필봉산이 지척이다. 필봉산은 산의 모습이 붓끝을 닮았다 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다. 동양학자 조용헌은 붓끝을 닮은 문필봉이 있으면 그 산봉우리의 정기를 받아 지역에서 학자와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했다. 산청에 있는 문필봉은 이름 자체가 아예 필봉산(筆峰山)이다. 그만큼 또렷하고 화강석으로 이뤄진 잘 생긴 봉우리이다. 조선시대부터 필봉산이 보이는 주변에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조선 초기 일두 정여창(1450~1504), 옥계 노진(1518~1578)도 필봉산이 보이는 곳에서 태어났다. 근래에 필봉산이 뚜렷이 보이는 생초면에서 배출된 고시 합격자만 해도 어림잡아 30여명이다. 30명은 시골마을에서 적은 숫자가 아니다. 교수와 박사만 해도 30여명이다. 한 집 건너 판사 검사집이고 두 집 건너 교수나 박사집이란다. 왕산과 필봉산을 여러 차례 올랐는데 필봉산의 조망은 여우고개가 으뜸이고, 왕산의 꼭대기는 정상석이 없다면 헷갈린다. 필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가히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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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봉산 정상.


    ▲ 점촌희생자보존지역,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지리산의 깊고 깊은 계곡에서 유유히 흘러오는 동강을 따라가면 금서면 점촌마을 초입이다. ‘점촌희생자보존지역’이라고 새겨진 검은 비석이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게 다가왔다.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에서 아물지 않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값진 교훈을 새겨야 한다. 빛바랜 조화가 더 착잡한 마음으로 다가왔다. 점촌희생자묘비가 있는 곳은 지리산 둘레길 5구간을 지나는 길가다. 이곳 점촌마을에 살던 주민 60여명은 6·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2월 7일 오후 1시 30분경 국군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 당시 총탄을 맞고 아버지의 시신 밑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주상복(남, 당시 8세)씨가 그때의 일을 전하고 있다 한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죽여 놓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라고 울부짖던 여인의 절규가 들리지 않느냐고 적혀 있다.

    발걸음을 옮기면 2005년 12월 준공된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있다. 산청·함양사건에서는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을 하던 국군에 의해 양민들이 적을 도왔다는 이유로 1951년 2월 7일 오전 6시부터 산청과 함양지역에서 386명(유족회 주장 705명)이 희생됐다. 국가를 수호해야 할 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경칩인 주말 오후 고요와 적막이 감도는 묘역에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높고 긴 돌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서는데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영령들의 억울한 통곡 소리처럼 유난스럽게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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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의 회양문.



    ▲ 화림사·오봉마을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앞을 지나는 길이 지리산 둘레길 제5구간 동강~수철리 길이다. 오봉천 가현교를 건너 깔때기 같은 오봉계곡을 따라가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오봉계곡은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 오지 중의 오지에 있어 원시 모습을 지켜오고 있는 곳이다. 지난해 2월에 다녀갔으니 벌써 1년이 지났다. 세월이 빠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중년 남자들이 칡을 씻고 있었다. 새싹이 나오기 전에 캐는 칡이 영양분이 가장 많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허가 없이 임산물을 채취하는 것은 불법이라 했다. 물소리를 뒤로하고 깊은 계곡으로 빨려들어가면 제법 넓은 터에 조계종 해인사 말사 화림사가 있다. 인기척에 절집 안살림을 하는 마음씨 고와 보이는 보살이 극락보전에 가는 길에 인사를 건넸다. 산 좋고 공기 좋아 힐링이 그냥 되겠다고 인사를 했더니, 대뜸 손사래를 치며 맑은 공기도 싫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 적막강산이라 했다. 화림사는 6·25전쟁 때 불탄 것을 중창했다. 절집에 대한 기록은 노광무(1808~1894)가 쓴 유방장기에 1848년 4월 29일~5월 9일에 산행을 하다 화림사에 들렀다 했다. 인자하고 넉넉해 보이는 미소를 담고 있던 원효스님이 차 한잔하고 가란다. 지난해에는 눈 때문에 화림사 인근에 차를 두고 갔는데 길이 말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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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림사 극락보전.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면 오지 오봉마을이다. 이곳에는 처음 경주 김씨 일가가 살았다. 지금은 15가구가 살고 있는데 두세 집을 제외하고 한 사람씩 살고 있다. 원주민은 2가구이고 10년 전후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오봉마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물질문명에 행복의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다. 그래서 높고 깊은 지리산에 기대어 산다. 계절 따라 산에서 자연이 주는 만큼 받아오고 여름에는 천혜의 피서지라 민박을 한다. 마을에는 개 짖는 소리나 닭 울음소리도 없고 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계곡물 소리와 솔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만났던 강성국(67)씨는 충북 영동에서 20여년 전에 왔는데 고향 이름을 따 영동민박을 열고 있었다. 6년 전에 부산에서 건강 때문에 와서 칡을 캤던 지용준(56)씨는 거처하던 비닐하우스를 말끔하게 단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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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마을.


    인근에서 오봉힐링캠프를 운영하는 박성건(63)씨는 한옥 건축가였다. 박씨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2001년 아내가 불치의 병을 얻어 시한부 삶을 안고 청정지역을 찾아 이곳 오봉마을에 왔다. 아내는 9년을 오봉마을 자연에서 살다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아예 사업을 접고 오지 오봉마을에 정착했다. 박씨의 통나무집 거실에 앉으니 넓은 유리창으로 지리산이 가득 들어왔다. 오봉힐링캠프는 3개의 방을 각각 특색 있게 꾸며 놓은 민박이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펜션이다. 자연의 재료로 한옥을 지어 황토를 바르고 방을 대나무로 마감했다. 넓은 지리산의 자연을 끌어들인 방이다. 또 다른 방은 편백나무로 마감을 했고, 한 곳은 황토벽에 한지를 발랐다. 대나무를 가로 매단 옷걸이가 운치가 있었다. 부엌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잠그려고 일어섰더니 웃으며 말렸다. 자연에서 빌려 쓰는 물이 잠깐 집에 들렀다 갈 뿐이란다. 자연이 주는 것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자연을 닮은 순박한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나왔다. 지난번에 눈길이라 가지 못했던 지리산 둘레길 5구간 종점 수철리로 가려고 가현마을로 들어섰다. 한참 길을 잃고 헤매다 산을 돌고 돌아 출발했던 오봉마을로 돌아오는 수모(!)를 당했다.

    심재근 (마산대 입학부처장·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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