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은
지하도의 오후를 내려가다
짐을 든 할머니를 도와
다시 오른다
할머니는 지팡이에 기대어
오른 다리로 계단을 오른다
짐을 든 손은 엉금엉금
벽을 오르는 담쟁이 같다
할머니도 빛났던 한때가
있었을 터,
빛고운 추억은 조글조글하다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는데
마주 오르는 둘은 모녀처럼
다정하다
새댁은 슬슬 계단을 오른다
이윽고 자신도 절름발이가 된다
한뜸한뜸 발걸음이
지구를 깁는다
☞ 느림은 시가 태어나는 자궁이다. 음풍농월(吟風弄月), 미음완보(微吟緩步)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시는 느림 속에서 태어난다. 어디 시뿐이겠는가. 예술은 느림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느림을 성자가 태어나는 모태라고 한다. 바쁘게 지하도를 내려가다가 다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지하도를 올라오는 새댁. 자신의 속도를 버리고, 엉금엉금 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같은 할머니의 속도와 하나가 된 새댁은 지하도를 내려갈 때의 일상인이 아니다. 그녀는 성자다. 느림의 세례를 받고 새로 태어난 성자다. 한뜸한뜸 발걸음이 지구를 깁는다! 절름발이가 되어 절름발이와 함께 걸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갈등은 치유되고 세상은 하나가 된다. 느림은 아픈 지구를 깁는 바늘이기도 한 셈이다. 보기 드문 절창이자, 경구다. 이중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