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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1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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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함안 출신 조웅래 대전 맥키스컴퍼니 회장

역발상으로 사업 성공… 힐링·문화사업으로 지역에 보답

  • 기사입력 : 2016-08-1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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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넥타이에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임에도 파란색 남방에 청바지, 그리고 분홍색 재킷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캐주얼화로 멋스러움을 매듭지었다. 식당 종업원과도 격의 없이 서서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소탈했다. 명함을 받고서야 주류회사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다. 권위보다는 편안함을, 격식보다는 내실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었다. 그의 명함 뒷면에는 ‘계족산 황토길 작업반장’이라고 적힌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활짝 웃는 표정이 나랑 정말 똑같지 않나요?”라며 천진스럽게 되묻는 모습에 소년 같은 순수함과 사람 냄새가 물씬 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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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키스컴퍼니 조웅래 회장이 계족산 황톳길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맥키스컴퍼니/

    ◆어머니로부터 철학과 마인드를 배우다

    맥키스컴퍼니 조웅래(57) 회장은 1959년 함안 산골의 가난한 집안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에게 세상의 큰 그림을 보게 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재산이라고는 논 10마지기가 전부였다. 아버지마저 그가 중학생이던 15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어려움은 더했지만 어머니는 그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머니는 학교를 아예 다녀본 적이 없지만 그가 초등학교 때 부모 학력과 직업란에 대졸이라고 쓸 정도로 살림살이를 잘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늘 “말부터 앞세우지 마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혹여 속 썩이고 부족한 면이 많은 자식일지라도 항상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재능과 장점을 살려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사춘기 때 하지 말라는 짓은 남보다 먼저 하면서도 그는 공부할 땐 눈썹까지 밀 정도로 악바리 근성을 갖고 있었다. “저는 미쳐야 비로소 미칠 수 있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을 중시합니다. 부족한 게 있어야 하고 싶은 것도 있게 되죠.”

    ◆샐러리맨에서 창업을 꿈꾸다

    그는 이미 사회에 발을 디딘 형들의 도움으로 마산고와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대기업인 삼성전자 엔지니어로 취업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만뒀다.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아서였다. 아내를 비롯해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다. 존재감 있게 일해보려고 ‘원격 검침 계량기’를 만드는 대구의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술영업 담당으로 발품을 팔다가 우연히 다방의 운세 재떨이가 눈에 들어오면서 ‘전화 운세’ 사업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회사를 다니며 모아뒀던 재산 2000만원으로 700-8484(팔자팔자)로 전화정보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1인 기업으로 많은 고생을 했지만, 고객이 서서히 늘면서 사업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마케팅의 귀재 소리를 듣다

    전화 운세를 통해 33살에 처음으로 성공을 맛봤지만 안주하지 않았다. 무선호출기인 이른바 ‘삐삐’가 보급되면서 자동응답기계를 통해 또 다른 서비스에 도전했다. 삐삐 사서함에 음악을 저장해 놓으면 목소리와 멜로디가 함께 나왔고, 이를 기반으로 휴대폰 벨소리와 컬러링도 선보였다. 추억의 광고문구인 700-5425(칠공공 오사이오). 음악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발상은 대박을 쳤다. 하지만 곧바로 IMF 외환위기가 오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기 급급했고, 대기업들도 광고비를 아끼던 시절에 그는 과감히 연간 100억원을 광고에 쏟아부었다. 밀레니엄으로 불리는 2000년을 앞두고 TV나 라디오에선 쉴 새 없이 700-5425가 흘러나왔다. 대대적 마케팅을 전개한 이 승부수는 멋지게 통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 IT 벤처붐과 휴대폰 시장이 커지면서 유선전화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는 한계에 봉착했다. 유사 업체가 우후죽순 뒤따랐다. 지속가능한 사업을 찾고 있던 그는 2004년 충청지역의 소주회사인 선양이 매물로 나오자 바로 인수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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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류회사를 인수하다

    연고도 없고 경험도 없는 제조업의 도전에 다들 미쳤다고 말렸다. 소주업계는 지역 연고주의가 강하지만 선양은 시장 점유율이 40%를 밑돌 정도로 지역 사람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는 데리고 있던 5425 회사 임직원 전원을 데리고 대전으로 이사했다. 선양에서 이름을 맥키스컴퍼니로 바꿨다. 새로운 회사명은 이을 맥(脈)과 키스(Kiss), 컴퍼니(Come+funny)를 합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즐겁게 이어주는 일을 한다는 의미다. 당시 선양은 국내 최초 알코올 21도의 ‘새찬’을 출시하고 있었지만, 생산을 중단시키고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오투(02) 린’으로 브랜드 이름을 바꿨다. 소주에 산소를 넣은 제품이었다. 브랜드 교체로 1년 만에 시장점유율을 50%대로 끌어올렸다.

    ◆문화콘텐츠로 지역에 녹아들다

    그는 지역민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마라톤으로 건강한 기업 문화를 정착시킨 그는 계족산에 맨발걷기를 접목시켰다. 이는 고교 친구들과 대전 계족산에 오르다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운동화를 벗어주고, 자신은 맨발로 걷다가 얻은 아이디어였다. “맨발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죠. 발이 성할 턱이 없었지만 몸 전체가 후끈거리고 잠도 푹 잤어요.” 그는 사람들의 신발을 벗기겠다고 결심했다. 산길의 자갈을 걷어내고 마사토를 깔았지만 촉감이 좋지 않았다.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황토를 깔았다. 전국에서 질 좋은 황토를 가져왔고, 그렇게 깔린 길이 무려 14.5㎞나 됐다. 비가 오면 휩쓸려가고, 닳아 없어졌지만 끓임없이 메우면서 황톳길을 유지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걷고 뛰는 행사를 기획했다. 하루에 3만보 이상을 맨발로 걷는 마사이족의 이미지를 차용해 마사이마라톤을 열고, 숲속에 음악회를 열 수 있는 상설 공연장을 만들었다. 산속음악제와 축제 등 문화콘텐츠가 가미되면서 계족산 황톳길은 지역 최고의 명물이자 맨발로 걷기 전국 명소가 됐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 3위, 여행 전문기자들이 뽑은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 33 등에도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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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웅래 회장이 계족산 황톳길을 걸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경남, 함안은 어머니의 품

    계족산 황톳길이 대전의 명물이 되면서 덩달아 그도 바빠졌다. 그의 마인드를 배우려는 대학과 공공기관, 기업들이 그에게 특강을 청했다. 유선망과 다방 운세를 접한 전화 사업, 늘 듣는 음악을 상대에게 들려준다는 역발상, 공중에 떠도는 산소를 넣은 소주, 자갈투성이 길에 황토를 깔고, 숲 속에 피아노를 옮긴 오페라 극장 등 신선하면서도 기발한 발상은 많은 공감을 샀다.

    그는 대전에 있지만 고향인 함안에 애착이 많다고 했다. ‘어머니의 품’이라 칭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인 1999년 10억원의 기금을 출연해 ‘조웅장학재단’을 설립한 것도 지역 사랑의 일환이다. 2000년부터 무려 17년 동안 장학금을 전달하면서 지역 초·중·고등학교와 지역 주민들에게도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사람은 동물처럼 귀소본능을 지니고 있어요. 함안은 어머니 품과 같은 곳이에요. 요즘은 함안이나 창원지역에 내려와 특강도 하고 친구, 친지와도 간간이 만남을 가집니다. 이런 만남 속에서 옛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습니다. 고향의 존재와 그리움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요. 그리고 고향을 위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찾아서 해야겠죠.” 고향에 대한 그의 그리움이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된다.

    글·사진= 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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