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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2) 옛 통영청년단회관

붉은 벽돌에 서린 항일의 숨결

  • 기사입력 : 2017-01-19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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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부분의 낡고 허름해진 건물은 리모델링이라는 새 옷을 입거나 신축이라는 새 삶을 얻는 숙명을 맞게 된다. 하지만 낡았다고 마냥 홀대할 수 없는 건물도 있다. 사연이 곳곳에 숨어 있어 오래될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곳이기에 그렇다. 건물에 묻어 있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 예향의 도시 통영으로 떠났다.

    통영에는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들이 꽤 많이 남아 있다. 당시 통영은 반농·반어지역으로 소작이나 어업권을 노리고 집단 이주한 일본인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일본인 소유의 기업체와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그 가운데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통영군청, 문화동 배수시설, 해저터널, 옛 통영청년단회관 등 4개의 국가지정 등록문화재가 있다. 그중 1923년 지어진 통영청년단회관은 나머지 3곳과 다른 태생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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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 문화동의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1923년 일제강점기 때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계몽 운동을 위해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통영청년단회관은 현재 충무고등공민학교, 통영사연구회, 통영서도회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세병관에서 내려와 큰길을 따라 충렬사 쪽으로 20m쯤 가면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통영시 서문로 23(문화동 236)에 적을 두고 있는 옛 통영청년단회관이다. 이곳은 우리 민족의 필요에 의해, 우리 민족의 자본으로 지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곳은 벽돌로 지어진 2층 양옥이다. 단조로운 외관이지만 검붉은 벽돌이 내뿜는 기운이 만만찮다. 영화 ‘밀정’, ‘암살’에서 본 건물과 외양이 흡사한 군더더기 없는 이 건물은 곳곳에 생긴 틈과 색바랜 벽돌이 꽤 긴 세월을 머금고 있음을 말해준다. 건물 중앙 현관에 ‘향토문화 창달은 문화원의 사명이다’고 쓰여 있는 파란색 표어가 남아 있을 뿐 별다른 표지가 없어 건물의 옛 용도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장식이 억제된 근대 기능주의 건축 성향을 띠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가운데에 현관을 둔 좌우 대칭형으로 1층과 2층 각각 18개의 수직창이 나란히 외관을 향해 배치돼 있다. 근대건축물의 전형대로 붉은 벽돌로 채워져 단단함을 뽐내고 있다. 건물 정면에 둔 유리문 현관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에 현판이 하나씩 걸려 있다. 오른쪽엔 통영사연구회, 왼쪽엔 통영서도회라고 한자로 새겨진 빛바랜 현판이 장승처럼 건물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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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10월에 만들어졌다는 통영청년회관 건립비는 건립 취지와 배경을 설명해준다. 3·1독립만세운동 직후 결성된 통영청년단은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활발히 광복운동을 했다. 항일의 전당이 필요해진 청년단은 모금을 통해 회관을 세우려 했지만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독지가 이영재씨가 밭 254평을, 임철규 단장이 사재를 희사해 당시 1만4000원을 들여 4년간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의 터줏대감격인 통영사연구회의 박형균(80) 회장은 “당시 자금이 부족해 청년단이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서 공연했다고 해요. 그래도 여유가 없자 임철규 단장이 전 재산을 털고 빚까지 내서 이 집을 지었다고 해요. 그 뒤 임 단장은 일본 순사들의 집요한 시달림에다 빚으로 가세까지 기울자 심신이 피폐해져 결국 동호동 앞바다에 몸을 던져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사연이 있습니다”라고 건립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일본인에게 건축을 맡길 수 없었던 청년단은 인근에 ‘호주선교사의집’을 짓고 있던 중국 기술자들을 불러다 붉은 벽돌을 붙이고 지붕은 기와식으로 만들어 집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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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통영청년단회관 1층 내부 모습.


    아픈 시대에 아픔을 갖고 태어난 이 건물은 소중하게 쓰여졌다. 통영청년단회관의 가장 큰 목적은 계몽과 교육이었다. 몽매한 국민을 일깨우기 위해 지육부(知育部)와 체육부(體育部)를 두고 문화활동을 지역사회에 확산시켰다. 지육부에서는 주로 순회강연회와 야학강습을 열고, 체육부는 우뢰축구단을 결성하는 한편 축구, 수영, 정구, 씨름, 마라톤대회와 시민대운동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통영청년단이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이 건물은 10년 남짓 청년단회관으로 쓰이다가 일제 어용단체인 청년동맹, 소년동맹 등의 사무실로 사용되며 굴곡진 세월을 보냈다. 회관은 긴 시간에 비례해 다양한 변신을 꾀했다. 통영세무소, 동부유치원으로 쓰이다 광복 이후에는 통영여자중학교, 나전칠기강습소, 시립도서관으로 활용됐다. 통영여중 교사(校舍)로 쓰일 당시, 학교에는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숱했다. 국어교사로 있던 유치환이 같은 학교 가사교사 이영도에게 연서와 사랑의 시를 보내며 가슴앓이를 했던 곳으로,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구절의 시 ‘행복’도 여기서 탄생했다. 또 요절한 천재 극작가 박재성은 국어교사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은 음악교사로 근무하며 새싹을 키워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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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2층은 충무고등공민학교로 이용되고 있다.

    품고 있는 사연에 비해 건물 내부는 단출했다. 1층 왼쪽 한 칸엔 서도회가 차지하고, 나머지 한 칸은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이 전술 신호용으로 사용했다는 전통연을 제작하는 기능전승자의 집이 들어와 있다. 오른쪽엔 통영사연구회 사무실과 열람실, 사료보관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안전을 위해 여러 번 보강공사를 진행한 탓에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곳곳에 걸려 있는 통영고지도와 고 김문환 선생이 복원한 수조도 등이 건물 제 나이를 말해 준다.

    이곳에선 웬만한 물건은 오래됐다고 명함도 못 내민다. 불 끄는 스위치가 요즘 것과 달라 오래돼 보인다는 말에 이충실 통영사연구회 연구원은 “에이, 그건 새 거예요. 한 20년쯤 됐나”라고 웃으며 답했다. 주차장에 있는 나무는 건물과 나이가 같으니 올해로 94살이 됐고, 벽에 걸린 최상한, 윤이상, 박기영, 탁혁수가 현악 4중주 공연할 때 찍은 사진은 70여년, 책상에 놓여 있는 쇠로 만든 아령은 함께한 지 60년을 훌쩍 넘었단다. 색 바랜 국어사전은 1986년에 만들어져 올해 32년 됐으니 방에선 신출내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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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엔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공민학교인 ‘충무고등공민학교’가 있다. 1950년에 발족한 뒤 1960년부터 현재 위치에서 여러 사정상 기회를 놓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교사 부족과 사회적 무관심으로 한때 폐교 위기까지 갔지만 무보수 교사들의 헌신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건물 곳곳을 설명하던 이충실 연구원은 건물의 근황을 묻자 근심 어린 얼굴로 변했다. 이 연구원은 “문화재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기는 하는데, 건물만 보고 그냥 가요. 궁금해하면 더 많이 알려줄 텐데요. 관심을 갖는 젊은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 진기한 자료와 노하우를 다 전수해줄 겁니다. 부지런히 배워 뜻깊은 역사가 이어져야 하니까요”라고 바람을 전했다.

    건물을 둘러보는 내내 선각자들이 우리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준 문화와 예술, 교육, 역사를 더 단단하게 이어야 할 책무가 느껴졌다. 건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시멘트, 콘크리트, 철근만 허물어지는 게 아니라 그 건물에 묻어 있는 사연과 살던 사람의 삶도 함께 없어진다는 뜻이다. 시간의 켜와 세월의 티가 덧대진 건물이 보존돼야 하는 이유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글= 정민주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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