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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2 (5) 이백/백운가송유십륙귀산(白雲歌送劉十六歸山)

  • 기사입력 : 2017-08-22 14: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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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값비싼 보르도 산(産) 와인이 세 병째 비워지고 있었지만
     내 앞에 놓인 잔의 키는 조금도 줄지 않았어요.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제 두 손은 무감(無感)했습니다.
     잔 베이스만 만지작대던 열 개의 손가락.
     비오는 날 차창처럼 흐리던 시야.
     귀 밑으로 자꾸만 흘러내리던 머리칼.
     그것이 와인바 창에 비친 내 모습이었죠.
     
     눈치가 없어 거기 그렇게,
     갈 곳 없는 여자처럼 앉아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돈 있는 남자가 와인을 마시러 가자고 했고, 나는 허락했습니다.
     그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무 사이가 아니어서 가능한 것들을 공유했어요.
     와인바에 가는 것도 그런 것 중 하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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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있는 남자…
     말해놓고 보니 참 멋 없는 말이네요.
     남자는 이 지방 중소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당한 사업체나 금싸라기 땅을 가진 유지(有志)
     혹은 이국의 이름모를 대학에서 학위를 따거나
     아슬아슬한 나이에 고시를 겨우 패스한,
     그런 정도의 층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요.
     남자는 나같은 부류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사회적 자본을…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돈과 명예를 존재 이전부터 지닌 사람이죠.
     그래서 그는 순수했고 고귀했습니다.
     인생이 한바탕 놀이라면 참으로 꽃놀이패 같은 사주팔자랄까요?
     
     당신이 우리 테이블에 끼어든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어요.
     이 어둑하고 아늑한 와인바의 사장,
     옅은 화장과 사뿐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마담,
     그게 바로 당신이었죠.
     
     당신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남자에게 참 오랜만에 오셨군요, 라는 말을 건넸어요.
     당신 말마따나 당신이 지금까지 와인을 팔며 다루어본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나 있겠어요.
     술에 취한 비열함, 토악질을 해대는 고귀함, 소리내어 우는 어리숙함, 위악적으로 변하는 슬픔…
     그런 것들 모두를 당신은 덤덤하게 보아왔겠죠.
     
     그 때문에
     당신은 지루하고 무감한 손짓에서, 하릴없이 흘러내리는 머리칼에서,
     내가 그 테이블에 앉아 무엇을 느끼는지…
     아니, 인생 전반에 걸쳐 무엇을 궁구(窮究)하고 사는 여자인지
     단번에 간파했던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 난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았겠죠.
     참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남자가 화장실을 간 사이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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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등산을 갔었어요. 가을 냄새가 지독하게 나서 산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한창 산을 오르는데, 맑은 시내가 흘러요. 마침 온갖 벌레가 팔다리를 쏘아서 괴로웠거든요. 물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한 줄 알아요? 옷을 입은 채로 그냥 물에 풍덩 들어가버렸어요. 시원한 물에 한참을 몸을 담그고 있다 밖으로 나와 따뜻한 바위 위에 축축한 옷을 입은 채로 누웠어요. 정말 따뜻했어요. 옷이 사각사각 말랐어요. 거기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는데,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 하나 보여요. 벌레가 갉아먹어 구멍이 숭숭 나 있었어요.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지나가고 하늘이 지나가고 벌레가 지나가고 새가 지나가데요.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조금 망가지거나 덜 완벽해 빈 공간이 조금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야 벌레도 오고 바람도 구름도 해도 비도 하늘도 나에게 오지 않는가.'
     
     그날 저녁 남자는 기분 좋게 취했습니다.
     얼굴은 불콰해졌고 말수도 점점 많아졌죠.
     수줍던 눈길도 조금씩 과감해져
     제 까만 눈빛이나 붉은 입술빛도 찬찬히 살피는 것 같았죠.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뜬 뒤에도
     당신이 해 준 나뭇잎 이야기에서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남자는 내 귀에 뭐라고 뭐라고,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예고 없이 만난 한 음유시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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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생각했어요.
     다음엔 혼자 이 곳에 와야겠다.
     취하도록 와인을 많이 마셔야겠다.
     얼근하게 취한 채로,
     나이든 마담이 느낀 슬픔과 아름다움에 관해 생각해야겠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남자의 마음은 가끔 내게 왔고
     나의 마음은 가끔 하늘과 구름이 드나드는 나뭇잎으로 갔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술래잡기와 같았고,
     남자와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닌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아무 사이가 아니어서 가능한 것들을 공유하다
     언젠가는 이별하겠죠.
     별로 거창할 것도 없는 와인바의 쓸쓸한 정경이나 어긋나게 교차하는 눈빛,
     공정하게 흘러가는 시간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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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산인들
     흰 구름 없으랴.
     그대 가는 곳
     흰 구름 따르리.
     길이 따르리.
     그대 초산에 들어가면
     구름도
     상수를 건너 따라가리.
     상수 가에
     석송으로 옷 지어 입고
     구름 속에 누우면 좋으리.
     어서 가보게.'
     
     楚山秦山皆白雲 白雲處處長隨君 長隨君 君入楚山裏 雲亦隨君渡湘水 湘水上 女蘿衣 白雲堪臥君早歸
     초산진산개백운 백운처처장수군 장수군 군입초산리 운역수군도상수 상수상 여라의 백운감와군조귀
     
     이백(李白·701~762)/백운가송유십륙귀산(白雲歌送劉十六歸山)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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