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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13) 산청 성심원

아픔과 상처의 기억공간, 소통과 화합의 치유공간

  • 기사입력 : 2017-11-02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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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년 지리산 자락 아래에 자그마한 마을이 들어섰다. 뒤로는 산이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경호강이 흘러 인근 마을과 완전히 분리된 외딴곳.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눈코입, 혹은 손발의 형태가 온전치 못한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진주 한센인 마을이었던 구생원에서 내부 갈등으로 이주해 온 60여명의 한센인들은 성치 못한 손발로 흙과 짚, 돌을 직접 나르고 또 다지며 살 곳을 만들었다. 이들은 6월 18일, 예수성심대축일에 자신들의 마을에 ‘성심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심원은 ‘육지 속의 섬’이었다. 바깥 사람들은 이곳을 가까이해서는 안 될 곳으로 여겼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 흉측하게 변하는 외모 탓에 사람들은 한센인에 대한 거부감이 극도로 심했다. 접촉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간에 발을 디디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리가 없어 성심원에서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는 나룻배밖에 없던 시절, 인근 마을 사람들은 경호강 건너편에서 손에 몽둥이를 든 채 이들이 뭍으로 나오는 것을 감시했다.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때는 아주 늦은 밤 잠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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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 산청읍 산청대로1381번길 17에 위치한 성심원 입구. 비석에 성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이주하고 첫 2년 동안은 낮에도 산속에 들어가 계셨대요. 혹시나 말이 나오거나 누가 신고해서 쫓겨나게 될까봐. 산에서 칡뿌리 같은 거 캐먹으며 버티다가 해질 무렵이 돼서야 내려오셨다고 해요.” 성심원의 곽경희 사회복지사가 한(恨) 많은 세월 이야기 일부를 들려준다.

    성심원은 1995년 정부로부터 사회복지시설로 인가받으면서 한센인 시설인 성심원과 중증장애인 시설인 성심인애원으로 분리된 형태인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지원을 받아 새 건물을 지었고 낙후된 건물을 새로 개보수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겉이 깨끗해졌다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진 않았다. 성심원은 여전히 병자들이 가득한 곳, 멀리해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닫혀 있던 성심원이 바깥 세상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건 2012년부터다. 그해 성심원 원장으로 부임한 오상선 바오로 신부는 외부인들을 성심원으로 초청하는 ‘성심인애대축제’라는 행사를 마련했다. 50여년간 닫혀 있던 성심원의 문이 처음으로 활짝 열린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이 어르신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뭔가를 고민하다가 인간관계에 생각이 미쳤죠. 지역사회와 소통하면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 그게 바로 어르신들의 숙원이고 성심원의 마지막 과제라고 봤습니다.” 오 신부가 축제를 기획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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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증장애인들이 있는 성심인애원.



    첫 축제는 5일 동안이나 계속됐다. 지리산둘레길 걷기, 이해인 수녀의 시 낭송회, 가수 안치환 공연, 지역 작가들의 그림·사진 전시, 지역특산품 바자회 등 넉넉하지 않은 여건에서 다소 무리할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을 채워 넣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성심원으로 발걸음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오 신부는 일단 한 번만 와보면 편견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성심원의 첫 집들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 신부의 예상대로 와본 사람들은 성심원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털어냈다. 봉사자 등록이 늘어났고 여러 분야에서 후원도 많아졌다. 성심원은 이듬해, 그 다음해도 문을 열고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렇게 올해까지 총 6회의 축제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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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심원을 오가던 나룻배와 벽화.



    이제 한센 어르신들은 읍내로 나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도 자유롭게 산다. 한센인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가진 노인층에서 여전히 껄끄러워하고 그간 모진 경험 때문에 어르신들 스스로가 아직 조금 위축돼 있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풍경이다.

    “어르신들이 산청 읍내에 가시면 자주 찾는 식당이 있어요. 왜 거길 그렇게 가시냐고 물어봤죠. 어느 날 그 식당에서 한 손님이 나가면서 어르신들 쪽을 보더니 성심원에서 왔다는 걸 알고는 ‘이사람들 식당에 못 오게 하라’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식당주인이 ‘아저씨가 안 오시면 된다’고 했대요. 이분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손님이라고요. 거기에 깊이 감동을 받으셨대요.” 오 신부가 웃으며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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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강당 입구에 붙어 있는 지리산 프로젝트 전시 포스터.



    성심원은 축제로 세상에 첫발을 디딘 후 보다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간다. 2014년에는 지역 문학교수를 멘토로 초청해 한센 어르신을 대상으로 시 강의를 열었다. 어르신들은 시 모임을 꾸려 처음으로 직접 시를 썼다. 1년간 80여 편의 시가 모였다.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을 받아 2015년 4월 ‘장단 없어도 우린 광대처럼 춤을 추었다’는 제목의 시집이 출간됐다. 참여했던 어르신 모두가 정말 기뻐했다고 한다.

    성심인애원 입구에 걸려 있는 박두리 어르신의 시 ‘성심원’에는 질곡의 세월이 고스란히 뭍어난다. ‘내 사는 곳, 지금은/성심원 내립니다/ 눈치보지 않고 말한다/ 그러나 그 옛날에는/ 이곳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중략) /차에서 튕기듯이 내려 배 타고 들어오던/ 정말 서글펐던 시절이었건만/ 이제는 동병상련의 같은 처지끼리/ 웃음인지 울음인지 떠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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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심원 내 납골묘원.



    2015년에는 자연, 우주, 공동체의 가치를 탐구하는 예술 프로젝트인 ‘지리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지역 미술작가들이 성심원에 체류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영상, 설치 등 작품으로 만들어 곳곳에 전시했다. 대강당을 비롯해 성심원 건물 곳곳이 전시장으로 변했고 내부 성당에서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성심원 대강당 건물 벽면에는 구현주 작가가 그린 벽화가 남아 있다. 대강당 바로 앞에 실제로 보존돼 있는, 성심원과 육지를 이어주던 나룻배를 그린 그림이다. 오 신부는 앞으로도 성심원이 ‘마지막 과제’인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할 예정이란다.

    현재 성심원에는 70~90대 고령의 한센인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한센인 세대다. 1980년대 백신 보급으로 완치가 가능해지면서 국내서는 새로운 한센병 환자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약 20년 후면 성심원에서 한센인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앞으로 성심원은 중증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돌봄 시설로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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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심원 내 약국.



    “전국에 한센인 마을이 80여개가 있는데 대부분 개발 논리에 밀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어요. 재개발이 되고 나면 그곳이 한센인 마을이었다는 사실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겠죠….” 오 신부가 말끝을 흐린다. 사라져가는 한센인들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 성심원은 건물 내부에 역사자료관 개관을 준비 중이다. 아픔과 상처가 가득했던 오랜 세월, 그것을 치유해온 과정을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언젠가 성심원에서는 더 이상 한센인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성심원 앞에 한센인 시설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잊힐지 모른다. 그래도 건물 한쪽의 작은 공간은 기억할 것이다. 꽃과 나무가 가득한 지금의 따뜻한 마을은 지난 시절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일군 것이었노라고.

    김세정 기자 sj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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