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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15) 진해 경신복지의원·희망의집

진해 슈바이처가 남긴 ‘연약한 이들의 안식처’
1958년부터 모자의원 운영한
‘진해 슈바이처’ 이봉은 원장

  • 기사입력 : 2017-11-3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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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없고 나약한 노인들에게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어요. 돈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노인은 물론이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돌아갔어요.”

    30년 가까이 진해 모자의원과 경신복지의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김점숙(61) 여사는 이곳을 ‘노인들의 안식처’라고 했다.

    1958년 진해 충의동에 문을 연 모자의원은 1995년 소실돼 병원이 문을 닫기까지, 1997년 진해희망의집 1층에 문을 연 경신복지의원은 2004년 10월 문을 닫기까지 ‘진해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이봉은(1916~2005) 원장이 평생을 가난한 자와 병든 이들을 위해 사랑의 의술을 실천한 곳이다.

    의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랑을 실천한 이봉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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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동 진해희망의집. 1층 희망아동복지종합센터가 지난 2004년까지 경신복지의원이 운영되던 곳이다.



    1958년 일제시대 여관을 불하받아 진해 충의동에 모자의원을 개원한 이 원장은 일반환자는 물론 헐벗고 가난한 자, 힘없는 노약자, 전쟁고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까지 고루 보살폈다.

    ‘ㄷ자 형태’의 2층 건물은 항상 환자들로 붐볐다. 당시 진해에는 병원이 민중의원을 포함해 2개 정도밖에 없었기에 새벽부터 몰려드는 환자들이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고, 1층 진료실을 포함한 20여개의 병실은 정신질환 환자, 결핵환자 등 다양한 환자들로 넘쳤다.

    “새벽 4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어요. 당시 오전 8시 30분에 문을 여는데도 진료를 받으려고 할아버지가 줄을 서고, 다음 할머니가 줄을 잇고, 다음에 아빠가, 맨 마지막은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진료를 받았어요. 그렇게 많은 환자들이 왔지만 원장님은 단 한 번도 소흘히 진료한 적 없어요. 이 시대에 너무너무 아까운 사람이에요. 돌아가셨을 때 진해에서 별이 사라지는 줄 알았어요.”

    당시 간호사로 근무했던 김 여사는 모자의원에서 환자들을 보살피던 이 원장을 기억하며 눈가에 그리움의 눈물을 보였다.

    이 원장이 사랑의 의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의 뜻이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2학년이던 21살의 이 원장은 ‘너는 불쌍한 노동자를 위해 일생을 살아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소외되고 그늘진 곳의 이웃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사랑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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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은 원장이 모자의원 앞에 서 있다.



    그러나 모자의원은 1995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완전 소실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의원은 잿더미로 변했다. 누구보다 안타까워한 이들은 인근 주민을 비롯해 많은 시민들이었다.

    “안타까웠죠. 다른 병원과 달리 여기는 정을 나눌 수 있었어요. 원장님과 얘기를 나누고 나면 마음의 상처까지 치료가 되는 것 같았어요. 다른 병원과 달리 일반 환자들도 저렴한 가격에 진료를 받을 수 있어 정말 좋았는데 이런 곳이 사라졌으니….” 당시 진료를 받았던 인근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모자의원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이 원장은 2년여의 휴식기를 거쳐 1997년 4월 진해 제황산동 진해희망의집 1층에 자신의 평생의 꿈인 노인들을 위한 무료진료소 경신복지의원을 개원했다.

    “의원이 불에 탄 후 원장님과 다른 병원에서 잠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적성이 맞지 않아 몇 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어느날 원장님이 저에게 ‘마지막으로 노인들을 위해 헌신하자’고 제안하시더라구요. 그래서 흔쾌히 승낙했죠.” 김 여사는 경신복지의원이 문을 열게 된 사연을 소개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노인전문의원인 경신복지의원은 66㎡(20여평)의 자그마한 공간이었지만 진료실과 주사실, 약제실 등을 갖추고 가난하고 병든 노인들을 맞았다. 소문을 듣고 노인들이 몰리면서 의원은 늘 붐볐다. 말이 좋아 의원이지 경신복지의원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는 노인들의 쉼터이자 사랑방이었다.

    “원장님은 몸의 질병은 물론이고 마음에 응어리진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셨어요. 그래서 울화병이 난 할머니들이 진료받고 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진료실을 나오셨죠. 다음 날이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다시 찾아와 ‘원장 어디 갔노?’라며 찾으셨죠. 한 번은 하얀 손수건에 빨간 홍시(대봉)를 싸오셨는데 오다가 터져버렸나 봐요. 그런데도 원장님은 ‘그래! 그래! 내가 홍시를 좋아해. 고마워’라며 감사의 마음을 표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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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진해 충의동에 문을 연 모자의원.



    진료를 마친 후에도 노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기실에 남아 집안 이야기, 아들 이야기,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난 이야기까지 모두 꺼내 이야기꽃을 피웠다.

    당시 진료를 받았던 이경미(75) 할머니는 “병원에 오면 마치 내 집에 온 것 같이 편하고 좋았어. 상처입은 마음을 다독여주시는 원장님이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병원비가 없어 쫓겨날 일도 없었으니 여기가 우리들의 낙원이었지”라고 말했다.

    이처럼 경신복지의원은 2005년 8월 이봉은 원장의 별세로 문을 닫기 전까지 노인들의 편안한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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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신복지의원 앞에 선 이봉은 원장.



    노인들을 위한 무료진료소인 경신복지의원이 진해희망의집 1층에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숨겨진 사연이 있다.

    진해희망의집은 이 원장이 모자의원 시절인 1957년부터 아들인 이경민(현 진해희망의집 원장)씨에게 희망의집을 맡긴 1986년까지 30년 동안 전쟁고아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돌본 꿈과 희망이 가득 담긴 사랑의 공간이기도 하다.

    1945년 ‘가족을 잃고 생존에 위협과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삶의 희망을 주자’는 뜻을 담아 이 원장의 장인인 이약신(1898~1957) 목사가 문을 열었지만 1957년 작고하면서 ‘고아들의 보금자리’로 거듭났다. 희망의집 운영에 드는 비용 일체는 모자의원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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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이 따스한 어느날 오후에 찾은 진해희망의집은 하얀 건물 사이로 새어나오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로 가득했다. 깔깔거리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노인들의 안식처였던 경신복지의원은 어린이 전문 상담실로 바뀌었지만 진료실과 대기실 등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아련함이 밀려온다.

    희망의집 잔디밭 중앙에 자리한 모자상은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진해희망의집은 늦가을의 풍요로움을 간직한 채 살며시 찾아온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글·사진= 이준희 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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