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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갈수록 - 배종환

  • 기사입력 : 2018-06-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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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난꾼이면 이해라도 하지 경동시장 짐꾼으로 따라갔다 오자마자 마늘 두 접을 까란다 “까라”는 말은 군대 전역 후 잊은 말이라 새삼스럽지만

    살아오면서 속 썩인 일이야 한두 번 있겠지만 해가 바뀔수록 남몰래 속 앓는 날 많아졌다

    오전부터 나가시는 아내를 보자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지 못해 막걸리 한 병 차고 가면 오 리, 오면 십 리 길을 걷는다


    그동안 물에서 불어난 통마늘과 내가 끓인 라면발이 허물거린다 뭉개진 가슴 버짐나무에 버리고 왔는데 또다시 벗겨지는 늦은 한낮이다

    시린 무릎 펴며 일어선 나의 뒤꿈치가 묵은 그림자에 끌려가며, 간간이 늘어가는 검버섯 벗기어 흰 속살 드러내는 맵고 찡한 날

    ☞ 6월은 우리나라 양념의 대명사 격인 마늘 수확 시기이다. 이때가 되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업주부들은 일 년치 먹을 마늘을 사들이고 효율적인 보관을 위해 장갑을 겹으로 껴도 손끝이 아리는 마늘 까기 작업에 돌입한다. 이즈음 쓴 것 같은 현장감이 잘 살아있는 이 시는 언뜻 읽으면 남성우월주의사회에서 남편에게 평생 “까였던” 아내가 “까라”로 변해버린 세상과 맞닥뜨린 늙은 남자의 신세 타령으로 읽힐 위험이 있다. 하지만 끝 연의 ‘나의 뒤꿈치가 묵은 그림자에 끌려가며, 간간이 늘어가는 검버섯 벗기어 흰 속살 드러내는 맵고 찡한 날’ 구절에 이르면, 불어터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혼자 접 마늘을 까는 설움을 안겨준 존재가, “까라”로 변해버린 아내도 시대도 아닌, 자신의 그림자처럼 찰싹 붙어서 ‘횐 속살’을 ‘검버섯’으로 만들어버리는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시는 “까라”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늙은 남자의 서러운 마늘 까기에 빗대어 유한한 시간에 속절없이 “까이는” 산다는 것의 근원적 서러움에 대한 지금까지 없던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있다. 마늘을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은 이 시가 부럽다. 조은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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