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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장군대좌형의 명당

  • 기사입력 : 2018-09-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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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시 곤명면에 위치한 다솔사(多率寺)는 503년 (신라 지증왕 4)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岳寺)라 불렀으며, 636년(선덕여왕 5)에 부속건물 2동을 건립하고 다솔사로 개칭했다. 그 후 자장율사, 의상대사 등 고승들이 머물면서 건물을 더 짓고 영봉사(靈鳳寺)라 불렀으며,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부속건물 4동을 건립하고 다시 다솔사라 개칭했다. 남쪽 바다에 닿아 있는 곤명면은 진산(여기서는 조종산을 뜻함)을 지리산으로 하는데, 수백 리를 달려온 용은 곤명 북쪽에 봉우리를 맺은 봉명산 아래 자리를 잡았으며 그곳에 절이 있다. 다솔사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으로 풍수적인 표현은 장군이 진영에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형상이라 하여 ‘장군대좌형(將軍臺座形)’이라 한다. 다솔사를 포함한 봉명산(鳳鳴山) 일대에는 많은 인재가 활발히 활동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다솔사를 승병 기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펼쳤으며, 김법린(1899~1964)과 최범술(1904~1979)이 이곳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과 교육 활동을 했다. 가히 ‘장군대좌형의 명당’이라 할 만하다.

    다솔사 입구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위에는 예사롭지 않은 글이 새겨져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도가 정(鄭)모씨가 경상도 관찰사의 힘을 빌려 선영을 다솔사에 이장할 계획을 세웠는데, 사찰의 존폐가 걸린 문제인지라 절 내의 승려와 신도들이 작성한 다솔사 구원의 탄원서를 네 명의 스님이 임금에게 알리고자 급히 상경 길에 올랐다. 도중에 왕명을 받은 동지사(冬至使·조선시대 동지에 명과 청나라에 보내던 사절)를 만나게 되어 탄원서를 올리자 탄원문을 읽은 동지사가 ‘어금혈 봉표(御禁穴 封標)’라 써 주며 말하기를 “상감께는 이 길로 아뢸 것이니 그대들은 입장(入葬)을 못하도록 서둘러 내려가라”고 지시를 했다. 어금혈 봉표란 어명으로 다솔사 도량에 혈(穴·묏자리)을 금(禁)하게 한 표이다. 네 스님의 정신불교(挺身佛敎)의 일관된 단심으로 다솔사는 살아남게 되었다. ‘어금혈봉표’는 고종 22년(1885) 10월 해월스님의 글씨로 조각됐는데, 그 뒤 1900년 초에 영명(英明)스님이 개각했다고 한다.

    부처님께 효를 다한 네 스님이 있다면 효행을 널리 알린 효자이자,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화씨를 가져와 백성들에게 무명옷을 입게 한 문익점 선생이 있다. 선생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 2월 8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배양리)에서 충정공 문숙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76년 선생이 청도군수로 있을 때 어머니 조씨(趙氏)가 세상을 떠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즉시 고향으로 갔다. 얼마 후 왜구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노략질을 하다가 머리를 산발하고 무덤 앞에서 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있는 선생을 발견했다. 그 효성에 감복한 왜장은 부하들에게 “효자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하고 나무를 쪼개 ‘물해효자(勿害孝子)’라는 글을 새겨 표지석을 세우고 이 마을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시를 했다. 선생의 효성 덕분에 인근 마을까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할 수가 있게 되었다. 1383년 고려 우왕 때 명을 받은 안렴사 여극인과 고성군수인 최복린은 선생이 사는 마을에 ‘효자리’라는 비석을 세워 “전 중현대부 청도군수 문익점은 모친을 위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당시 왜구가 침범했으나 뜻을 지켜 변함이 없었다”라는 글을 새겼다. 현재 배양마을로 불리는 마을이 고려 때 ‘효자리’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유서 깊은 마을이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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