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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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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칼럼]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 기사입력 : 2019-03-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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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녕 (김해어방초 교사)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가는 거다. 목은 늘어지고 가슴에 새겨진 ‘Be the Reds!’라는 문구가 떨어져 흔적만 남은 2002년 한일월드컵 티셔츠가 좋겠다. 예전에 걸레로 쓰다가 버렸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 1993년 대전엑스포 꿈돌이가 그려진 옷은 주문 제작이 가능하다니까. 바지는 황토색 골덴 바지가 딱이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멜빵을 하고 5초에 한 번씩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멜빵끈을 튕겨주는 게 포인트다. 면도와 머리 감기는 3일 정도 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굵고 검은 코털 3가닥을 콧구멍 밖으로 길러내는 것이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치밀하지 못한 생각이다. 마음씨 좋은 누군가는 올해 전근 오신 선생님께서 패션 센스와 위생 관념이 다소 부족할 뿐이라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 교장실에 들어가면 인사부터 달라야 한다. 앞으로 모았던 손을 풀어 손끝이 밖을 향하도록 양옆으로 내리고, 왼쪽 무릎은 꿇고 오른쪽 무릎은 세운 상태로 앉는다. 단아하게 허리를 구부리며 잠시 멈춘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일어나 손을 맞잡는다. 그제야 말하는 거다.

    “소녀, 문안드리옵니다.”

    내일모레 마흔인 남자 선생님이 하는 여자 평절을 보고 그 누가 정상이라고 여기겠는가? 이쯤 하면 올해 업무는 ‘신발장 정리’ 정도가 될 것이다.

    학교의 업무 분장은 참 오묘하다. 학교마다 하는 사업이 다르고 해마다 선생님들이 바뀌기 때문에 매년 업무 분장을 다시 짜야 한다. 문제는 회사처럼 업무가 있고 거기에 맞는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학교는 사람에 맞춰 업무를 나눈다는 것이다. 교장, 교감선생님도 사람인지라 성격이 모나거나 조금 이상한 선생님, 못하겠다고 버티는 선생님들에게는 일을 주지 않더라. 당연히 그 일은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몫이 되어서 일 잘하는 선생님에게는 더 많고, 더 힘든 업무가 주어진다.

    그래서 2월이 되면 선생님들은 저마다 바쁘다. 3월부터 시작하는 다음 학년도에 원하는 업무를 얻어내기 위해 교장, 교감선생님께 찾아가서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말한다. 아픈 몸과 어린 자식, 병든 부모님, 대학원 진학, 지난 학년도에 힘들었던 자신의 업무에 대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계획대로 쏟아낸다. 그런 업무 분장에 더해 학년 배정까지 겹쳐지면 2월의 초등학교는 혼돈의 나락으로 빠진다.

    나처럼 누구나 업무 분장을 위한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교감 선생님께서 업무 분장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상녕 (김해어방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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