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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이영주 전교조 초대 경남지부장

“군대, 학교, 노조 돌고 돌아 ‘자유인의 삶’ 정착했죠”

  • 기사입력 : 2019-07-11 20: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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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일 오전 학교장의 ‘갑질’에 강력 대응하기 위해 힘을 합치겠다며 7개 교직원 노조가 협의체를 구성했다. 학교 내 부조리를 바로잡고 공교육을 바로 세우겠다던 30년 전과 오버랩된다.

    기자회견이 진행된 날 오후 고향 사천에서 ‘백수’로 있는 이영주(65)씨를 만났다. 그는 30년 전인 1989년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범과 동시에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았던 이영주씨가 사천의 한 카페에서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았던 이영주씨가 사천의 한 카페에서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사천에서 태어난 이영주 전 지부장은 동성초를 나와 진주로 유학했다. 진주중과 진주고를 거쳐 경상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는 교직으로 나아가지 않고 돌연 입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선생 빼고 뭐든지 하려 했습니다. 선생 외에는 다 잘할 것 같더라고.”

    공군 단기장교로 4년여를 근무했다. “공군본부 벙커에서 상황장교까지 했죠. 군대는 체질에 맞았어요. 원래는 중위로 제대하는데 특기 때문에 대위로 특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생 둘이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군이 학교로 진입해서 무차별 폭행했어요. 군에 있었지만 상황장교여서 공수부대가 학교에 진입한 당시 상황을 알았죠.” 그는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7월 31일부로 군을 떠났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옷을 벗었죠. 그리고는 9월 1일자로 통영여중에 교사로 임용됐습니다.”

    교직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부터 교장과 부딪혔다. “전두환이 한 것 중에 몇 개 안 되는 좋은 것 중 하나가 과외수업 없애고 보충수업 없앤 거였죠. 그런데 교장이 보충수업을 하겠다는 겁니다. 교사들은 당연히 반발했습니다.”

    이영주 선생은 1년 반 만에 쫓기듯 섬으로 보내졌다. 산양중학교였다. 그곳에서도 충돌했다. 도서관에 책이 들어오면 들어온 양만큼의 책이 어디론가로 갔다고 한다. “질이 낮은 책은 학교에 두고 양질은 집에 가져다 놓는 거였습니다. 갑자기 학교에 수도공사를 해서 이상히 여겨 조사했더니 교장 집에 수도공사를 하고 있는 거였죠.”


    이영주씨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당시의 사진 자료.

    이영주씨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당시의 사진 자료.

    이영주 선생을 비롯한 교사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고, 전두환 정권이 만든 ‘정화위원회’를 역으로 이용했다.

    “나라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기관에 정화위원회 뒀고, 학교에도 있었죠. 교사들이 나서서 정화위원회를 개최했고 교장과 간사의 부정부패를 정식으로 문제 삼고 둘 모두를 정화대상자로 올리기로 결의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는 또 학교를 옮겨야 했다. 감사반이 내려왔지만 교장이나 주임교사가 아닌 이영주 선생에 대해 감사를 벌였다.

    “동료 교사 숙직 대신 서 준일을 문제삼아 경고를 주고는 충무중학교로 보냈습니다.”

    충무중에서도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사천 서포중학교로 옮겼다. 1986년이다. 전교조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경남교사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교사들이 촌지를 안 받는다고 선언한 것이 경남이 시작이었습니다. 한 번은 하숙집 앞에 포장마차에 갔는데 아줌마가 내가 선생인 줄 모르고 하소연하더라고요. 내일 딸 학교에 가야 되는데 걱정이랍디다. 담임선생이 오라는데 돈을 얼마나 넣어 가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죠. 장사도 어려운데 당연히 돈은 갖다 줘야 하는 것이고.”

    이른바 ‘촌지’. 학교에 돈 봉투를 갖다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가 담임을 맡은 반에 학부모가 와서 3만원이 든 돈 봉투를 준 일이 있었다. 당시 한 달 봉급이 10만원일 때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봉투가 들어오면 반장 앞으로 통장을 만들어 넣고 아이들 모두를 위해 썼습니다. 그 뒤로부터는 돈 봉투를 안 주더라고요.”

    이를 계기로 뜻을 같이하는 교사들과 함께 촌지거부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무렵이다.

    학교의 부정부패나 악습을 없애는 일 못지않게 고민한 것이 학생들의 ‘극단적 선택’이었다.

    “한 해 수백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학생들은 죄수, 선생들은 간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 가둬놓고. 모든 것은 성적으로 재단하고, 야간학습한다고 학생들을 잡아두는 시간들. 노동자들이 버티는 시간과 비슷합니다. 당시 대학을 갈 수 있는 인원이 4분의 1 정도. 그들만 비로소 사람대접을 받았고, 4분의 3은 4분의 1을 위해 버티는 것과 같았죠. 학교가 불공정한 사회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1989년 전교조 출범과 동시에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은 그해 이영주 선생은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파면당했고, 구속돼 진주교도소에서 2개월여간 수감생활을 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듬해 ‘학교인사위원회 설치’를 건의하면서 도교육청 불법점거 등 혐의로 마산교도소에 두 번째 수감됐다.

    마산교도소에서 4계절을 갇혀 있었던 그는 출소 이후에도 계속 지부장을 맡았다. 해직교사 상당수가 복직했지만 그를 비롯해 주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복직을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1998년 9월 그는 의령동중에 복직했다. 전교조도 합법화됐다. 합법화 초대 지부장으로 교육감과 첫 단체교섭을 마치고 그는 전교조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영주씨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당시의 사진 자료.

    이영주씨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당시의 사진 자료.

    그의 다음 행보는 교육감 출마였다. 당시는 지금처럼 도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방식이 아닌 간선이었다. 교육감 선거에서 결선까지 올라갔지만 고영진 전 교육감에게 졌다. 2003년 경남체고 교사 시절이었다.

    지금은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교장 공모제’가 만들어질 때 이영주 선생도 역할을 맡았다. 그가 진주 정보고 교사로 있을 때였고,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담당자가 공모교장에 대한 제안서를 만들어보자고 한 것이다.

    “학교 현장을 바꾸려면 지금처럼 점수제 교장을 하면 쉽지 않습니다. 손을 비벼야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는… 그러면서 괜찮은 선생이 다 녹아버리고 하급 관료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공모제 교장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러다 2007년 남해군 설천면 금음마을에 있는 설천중학교 공모교장이 됐다. 전교조 출신의 평교사 출신 최초였다.

    “교장공모제를 만들었는데 내가 공모교장으로 가는 건 맞지 않다고 해서 고사했는데 주변의 강권으로 맡게 됐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았던 이영주씨가 사천의 한 카페에서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경남지부장을 맡았던 이영주씨가 사천의 한 카페에서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설천면과 남해읍은 지척. 학생들이 남해를 선호하면서 폐교 위기에 놓인 학교였다. 그러나 이영주 선생은 설천중 교장을 4년간 맡으면서 많은 변화를 이뤄냈다.

    “일단 공부를 좀 잘 시켜야 했죠. 예습을 하면 공부가 참 잘 됩니다. 내일 수업을 예고하고 이거 이거 읽어오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꼴등 비슷한 녀석들이 학력평가 같은 시험에서 성적이 올랐습니다. 덕분에 우수학교로 선정되기도 했죠.”

    인맥을 활용해 전국적인 명사를 초청해 특강도 했다. 한자 공부에도 공을 들였다.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교실과 화장실을 개선하고 헬스장도 만들었다. 지인들을 통해 3000여 권의 도서를 확보해 도서관이 제 기능을 하도록 했다.

    봉하마을로 찾아간 적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봉하에 머물던 시절이다. “인연이 있어서 요청을 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한데 봉하마을 언덕에 학생들이 앉아있고, 노무현 대통령이 경호실장이랑 밀짚모자 쓰고 자전거를 타고 와서 특강을 했죠.”

    그는 2011년 8월 말로 4년간 교장 임기를 채운 후 돌연 퇴임을 결정했다. 정년이 4년 6개월이 남아 있었다. 사천 남일대리조트에서 열린 퇴임식에는 가족과 동료 교사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지금은 ‘자유인’으로 고향에서 삶을 누리고 있다.

    차상호 기자 cha83@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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