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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1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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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강원 강릉·태백

눈이 시린 ‘겨울 수묵화’

  • 기사입력 : 2019-12-11 20: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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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밤의 추위에도 분주히 움직이는 청량리역. 뭐가 그리 운치가 있는지, 추억들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다수가 찬양하는 ‘낭만 있는 새벽 기차’로 정동진에 간다. 적당히 눈이 내린다면 예쁠 것도 같지만 귀를 베어내는 찬바람을 피해 올라선 기차. 무겁게 가라앉은 히터의 열기와 기분 나쁜 침묵만 감도는 열차 칸. 이 넓은 칸에 혼자 있는 건 나름 좋네. 바쁘게 움직이는 불빛을 가르며 출발하는 기차와 무관하게 낭만은커녕 잠이 쏟아지는 밤이다.

    기절. 그냥 기절했다. 불편한 자리와 무겁고 따뜻한 공기에 억지로 잠을 깨는 순간. 창밖으로 드리는 길어진 새벽과 쏟아지는 눈. 큰맘 먹고 온 강원도인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폭설에 잿빛으로 물든 새벽. 다행인지 기차는 잘만 달려 정동진이다. 이대로 강릉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지만, 다시 올 일도 없을지도 모르고 인제 와서 코스를 바꾸기도 애매하니 그냥 내렸다.

    폭설로 마비된 역. 철길을 제외하곤 빼곡히 쌓인 눈들. 우비를 입고 나왔는데도 바람에 날리는 눈에 금세 눈사람이 된다. 소나무 위에 앉은 눈들이 아름다움을 넘어 가여워질 지경의 폭설. 일출은커녕 얼어 죽을 것 같다. 추위를 피해 역 안으로 들어오자 비슷한 처지의 여행객이 10여 명. 나를 포함해 이 작은 역 안에 바람을 피해 모여있는 게 퍽 안쓰럽다.


    앙상한 겨울산 위로 백색의 잎이 무수히 덮인 풍광이 인상적인 강릉, 마치 흑백의 대비로만 그려진 수묵화 같다.
    앙상한 겨울산 위로 백색의 잎이 무수히 덮인 풍광이 인상적인 강릉, 마치 흑백의 대비로만 그려진 수묵화 같다.

    강릉으로 가기 위한 버스는 한참 뒤에 운행할 테고 그냥 주위나 걷자는 생각으로 나온 길. 무리다. 눈으로 도로며 인도 할 것 없이 마비 상태. 버스정류장 근처 편의점에서 요기나 하면서 추위를 피하는 수밖에. 멍하니 앉아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있기를 몇 시간. 버스 첫차 시간을 확인했다.

    몇 년 만의 폭설로 강릉 일대가 마비. 제설차가 중간중간 다니지만 치우는 것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른 눈. 버스 운행 시간만 기다렸는데, 답이 없다. 정동진역 근처에 갇혀서 움직일 방법도, 이른 새벽이라 사람들도 없는 기묘한 거리. 무작정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택시라도 온다면 타고 싶은데 차도 없고. 그렇게 몇 시간. 움직일 수단은 기차뿐이란다.

    그렇게 다시 몇 시간. 날씨 운이 참 없는 것도 같고, 몇 년 만의 폭설을 직접 체험하는 거니 운이 좋은 것도 같고. 늦은 아침이 되어서 역에 들어서는 강릉행 첫 기차. 새벽 쪽잠을 자던 의자에 다시 앉아 강릉을 향하는 길. 눈구름에 가려도 빛이 드리운 시간. 앙상한 겨울산 위로 백색의 잎이 무수히 덮인 풍광. 창문에 피어난 눈꽃. 멋진 풍경이다. 녹빛의 여름 산과는 다른 흑백의 대비로만 그려진 수묵화.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강릉으로 나간다.

    강릉역. 별다른 것 없다. 여기도 마비. 역 주차장엔 자동차 대신 눈이 무릎까지 쌓여있고, 중간중간 녹아내린 눈과 흙이 뭉쳐서 만들어낸 흙탕물들. 그 사이를 피해 길가로 나가자 드문드문 진행된 눈이 치워진 곳을 자동차들이 다닌다. 첫 목적지는 오죽헌인데.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눈길 위 천천히 기어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결국 실패. 이 눈길을 지나서 왔는데 폭설로 휴관.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건지. 이후 일정도 다 이런 꼴이려나. 기운도 빠지고 그냥 적당한 곳에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예약해둔 숙소는 산 중턱인데 눈 덕분에 차량 운행이 불가능하고, 그냥 여기를 떠나자.

    2시간 정도 지났나. 다시 온 강릉역. 그냥 젤 빠른 기차를 타고 여길 벗어나자. 어디를 갈지도 정하지 않고 그냥 앉은 기차 안. 얼어버린 몸을 녹이며 어디를 가야 하나. 뉴스에선 강원 영동에 기록적인 눈이 내렸다는 소리만 계속 나오네.

    태백에서 내리자. 그나마 눈이 덜 왔고, 황지연못, 검룡소, 바람의 언덕. 좋네. 여기나 가자. 강릉을 벗어나 태백으로 가는 길. 무섭게 내리던 눈발이 잦아들고 꽉 찬 열차는 정적에 쌓인 시간. 이른 새벽 추위에 얼어버린 몸을 녹이기 무섭게 태백이다.

    바람의 언덕, 하늘 아래 펼쳐진 설원과 거대한 풍차가 인상적이다.
    바람의 언덕, 하늘 아래 펼쳐진 설원과 거대한 풍차가 인상적이다.

    강릉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곳곳에 쌓인 눈을 피해, 황지연못으로 향한다. 낙동강의 발원지로 태백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발원지다. 태백에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가 다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인데 특히 시내에 있는 황지연못은 그냥 공원의 연못처럼 위치한다. 별달리 한 것도 없이 눈밭에서 떨며 시간을 다 보내고, 찜질방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날이 청명하다. 비교적. 눈구름이 산 너머에 자욱이 몰려들지만, 아직 쏟아지지 않은 시간. 바람의 언덕으로 향한다. 태백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바람의 언덕 초입에 내렸다. 사람은커녕 차도 없는 휑한 도로 위. 산길과 숲의 경계가 무너진 곳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걸으며 등산의 시작. 앙상한 가지 위엔 어제 내린 눈들이 얼어서 잎처럼 피어나고 자욱하던 구름의 중간파란 하늘이 보인다.

    희고 푸른 설산의 중간. 사이 너른 공간에 인간은 나 하나뿐인. 봄날의 벚꽃 같은 흰 눈을 지나 바람의 언덕이 보인다.

    푸른 배추밭이 사라지고 빼곡히 들어찬 흰빛과 풍력발전기들. 조금씩 보여주던 하늘이 열린다. 지상의 눈과 무관한 듯 청명하게 갠 하늘과 밑으로 펼쳐진 설원. 그 중간을 이어주는 거대한 풍차. 현실감이 옅어지는 풍경에 멍하니 주변을 눈에 담는다. 이걸 보려고 어제 그렇게 고생을 했던 건가? 인제 그만 내려가라는 건지. 맑던 하늘에 자욱이 눈구름이 몰려든다. 좀 전의 모습은 환상인 양 결국 쏟아지기 시작한 눈발.

    메인이미지

    △ 김영훈

    △ 1991년 창원 출생

    △ 창원대 세무학과 졸업

    △ 산책·음악·사진을 좋아하는 취업 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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