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2년 10월 02일 (일)
전체메뉴

창원만세사건 주도·옥살이까지 했는데 유공자 인정 못받아

그들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국가인정 못받은 창원 독립운동가

  • 기사입력 : 2022-08-11 21:38:18
  •   
  • 1942년 백정기·오경팔 등 10명
    청년독립회 조직해 만세벽보 붙여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옥살이
    1995년에 8명은 유공자 됐지만
    2명은 자료부족 이유 지정 안돼
    유족 “정부가 나서서 도와줘야”


    “우리는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알고 못 쓰는 책 종이를 뜯어 ‘조선독립만세’라 쓴 것을 창원역 앞 지하도, 다리 위, 전신주에 붙였습니다. 저는 부산형무소에서 해방이 되고 나왔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갔다 와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창원지역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독립회’ 단원으로 활동했던 오경팔 선생이 생전 남긴 말이다. 지역 청년들이 일제에 항거해 형무소에 수감된 뒤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고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 속에 살았다. 일부 단원은 자료 부족 등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수십 년 흐르며 정부와 시민들에게 이들은 잊혀가고 있어 유족들만 애태우고 있다.

    생전의 오경팔 옹./아들 오승재씨 제공/
    생전의 오경팔 옹./아들 오승재씨 제공/

    ◇10~20대들이 모여 항일운동= 일제 말 1942년 7월 창원보통학교 4학년생이던 오경팔 선생을 비롯해 백정기,조문대, 김명수씨 등 10명은 항일운동을 위해 청년독립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0~20대 어린 나이로 한동네에 살면서 조선 독립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며 항일운동 계획을 세웠다.

    청년독립회는 △신사참배 참석하지 않기 △학생들에게 신사참배 불참 권유하기 등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또 ‘조선독립만세’가 적힌 벽보를 만들어 창원역, 전신주 등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붙였다. 일본 경찰들이 수시로 벽보를 제거해도 이들은 굽히지 않고 계속 붙였다. 일명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했다. 결국 이들과 창원보통학교 교사 1명 등은 1944년 5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한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곧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석방됐다. 이후 이들은 경찰 검문이 줄어들자 다시 항일 운동을 시작했지만 같은 해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또다시 붙잡혀 광복 전까지 7~8개월 동안 고문을 받으며 감옥살이했다.

    ◇단원 일부는 자료 부족으로 독립유공자 못 돼= 청년독립회 단원인 백정기씨와 김명수씨는 모진 고문으로 인해 출옥 직후 세상을 떴다.

    이외 다른 단원들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평생 고통을 겪었다. 정부는 1995년에 김광수·김명수·박대근·박상규·배장실·장재상·조문대·최을택씨 등 청년독립회 단원 8명의 공훈을 기려 훈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백정기씨와 오경팔 선생은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지 못했다. 다른 유공자들의 공훈록에 ‘오경팔’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공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유족들은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유공자가 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오경팔 선생 아들 오승재(52)씨는 “아버지가 유공자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정부는 계속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며 유족들한테 자료를 찾아오라고 한다.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들은 정부가 당연히 보관해야 하는 것인데 아무런 권한이 없는 민간인들이 어찌 찾으란 말인가”라며 “같이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유공자가 되셨는데 저희 아버님은 안 되셔서 아쉽다. 원래 아버지가 소송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하지 못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을 정부가 나서서 도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영주 경남대 박물관 비상임 연구원은 “오경팔 선생뿐만 아니고 청년독립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백정기 선생도 유공자가 되지 못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이 유공자가 되지 않아 참 아쉽다”며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용감한 독립운동이 많이 일어났다. 일제의 폭압에도 10~20대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박준혁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