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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2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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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햇빛 수혈- 송미선

  • 기사입력 : 2023-11-16 0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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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투를 뜯는다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시집을 꺼내는데

    머리카락 한 가닥이 딸려 나온다

    쓰레기통 앞에 서서

    어느 쪽 끄트머리가 모근인지

    창문 쪽으로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춰본다

    머리카락에 닿은 햇빛이 푸른 핏줄을 깨운다

    디엔에이를 확인해 보라는 건지

    손끝 떨림을 간직하고 있는지

    한 군데쯤은 유전자가 일치할 거라고

    억지를 부리는 목소리에

    내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았다

    함께 보냈던 겨울을

    골방을 닮은 봉투 속에 집어넣는다

    같은 신을 믿으며 기도문을 고쳐나갔다

    뼈에 새겨 넣은 말들이 풀린다


    ☞ 가을엔 자주 우편함을 기웃거리게 된다. 그중 무사히 도착한 시집들을 꺼내, 받들 듯 공손히 집으로 들인다. 첫 장을 넘기다 보면 작가의 사인 옆, 눈에 띄는 것이 종종 있다. 때론 코딩한 네잎클로버를 발견하여 그 또한 한 편의 시적언어로 읽은 적 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시집을 꺼내다, 의도치 않게 딸려온 머리카락 한 올을 본다면 어땠을까. 이에 예사롭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시인이 있다. 모근을 햇빛에 비춰보며 시인의 DNA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고는 스스럼없이 본인의 머리카락을 뽑아 ‘골방을 닮은 봉투 속에’ 넣고 있다. 시 창작의 고뇌를 충분히 알고 있다는 의사 표현이다. 공감 능력 또한 일치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렇다. 시인의 DNA에는 언어의 힘줄을 견인하는 남다른 문화 유전자가 분명 있다. 햇빛 수혈에 푸른 핏줄이 돈다는 걸 볼 줄 아는 시인의 시력(詩歷)이 만만찮다. 가을이다. 가을엔 자주 하늘을 우러러보게 된다. -천융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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