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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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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 유산 읽기] (3) 창녕 진흥왕척경비와 만옥정 공원

비사벌에 세워진 신라의 업적… 진격의 진흥왕, 척경비를 세우다

  • 기사입력 : 2024-03-07 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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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24대 진흥왕이 비사벌가야 정복 후 세운 순수비
    약 250년 전 만옥정 정자가 있었던 만옥정공원에 위치
    퇴천삼층석탑·창녕객사·창녕 척화비 등 문화재도 자리

    세계지도 급변한 6세기 전후…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지도
    신라·고구려·백제가 축을 이루고 가야연맹이 부침 거듭
    진흥왕, 한강 유역·대가야까지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 개척


    우리는 ‘우리 역사’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에 익숙해 있다. 글로벌 시대에는 위험한 시각이다. 세상을 주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유산 읽기’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우리 역사 흐름이라는 타임라인에 맞춰 동시대 세계사를 함께 담아보기로 했었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진흥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신라부흥기에 세계는 어땠는지, 진흥왕 척경비 앞에 서서 생각한다.

    창녕 만옥정 공원에 있는 진흥왕척경비. 이 척경비는 신라의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이 한반도 각지에 세운 순수비 4기 중 하나다./김홍섭 소설가/
    창녕 만옥정 공원에 있는 진흥왕척경비. 이 척경비는 신라의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이 한반도 각지에 세운 순수비 4기 중 하나다./김홍섭 소설가/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이동의 역사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이동의 역사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유럽으로 이동하고, 조로아스터교는 이슬람의 탄압을 피해 인도로 가서 파시교가 된다. 그리고 불교는 인도의 복잡한 정치와 종교 갈등상황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향한다. 이미 육로와 해상으로 고대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불교. 진흥왕의 재임기간은 신라불교의 황금기였다. 540년 즉위하고 544년에는 신라 최초의 불교사찰인 흥륜사가 준공됐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불교에 귀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저명한 불교승려 원효나 사명의 존재도 진흥왕 시대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흥왕. 그는 신라의 영걸로 불린다. 신라시대 최대의 영토를 개척한 인물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에 비견된다.

    창녕에 가면 만옥정공원이 있다. 창녕공원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면적 1만㎡이니, 쉽게 말하면 3000여 평이 좀 넘는 작은 공원이다. 지정문화재와 봄철 벚꽃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유명하다. 약 250년 전에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그 당시에는 봄마다 명창 대회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렸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신라의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이 한반도 각지에 세운 순수비 4기 중 하나인 척경비가 있다. 신라 진흥왕이 비사벌가야를 정복하고 세운 것이다.

    진흥왕은 6세기 중반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했지만 백제가 방심한 틈을 타 순식간에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금관가야에도 밀리던 약소국가의 설움을 씻어냈다. 그 후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을 점령하고 대가야를 합병함으로써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개척한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던 가야가 그렇게 지도상에서 지워졌다. 이후 진흥왕은 북한산·황초령·마운령·창녕 등지에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다.

    퇴천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퇴천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국가들의 생성소멸이 반복되던 6세기 전후

    6세기를 관통하는 이 시기 세계지도는 급변하고 있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시기, 이민족들이 대거 몰려 이주를 원하자 처음에는 이들과 싸우던 로마제국은 마지못해 이들을 받아들이고 토지를 주어 살게 한다. 일단 고트족이 로마제국 안에 땅을 확보하자 게르만 족의 다른 갈래인 반달족이나 프랑크족도 자치지역을 얻어냈다. 그리고 5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는 아예 그 땅에 국가를 세운다. 마케도니아 지역에는 동고트 왕국, 영국에는 앵글로색슨 왕국, 에스파냐에는 서고트 왕국, 아프리카북부에는 반달 왕국, 그리고 프랑코 왕국은 지금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유럽의 중심이 된다.

    중국대륙 지도도 변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민족들이 세운 5호16국은 흉노, 갈, 저, 강, 선비족들이 16개의 나라로 나뉘어 살육을 벌이며 대륙을 피로 물들이던 이 시기는 ‘극도의 혼란시대’다. 이민족들이 중국을 두부 자르듯이 자르고 나눠서 지배했던 시기다. 국가라고 하지만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대부분 존속기간이 불과 몇십 년 안팎이다. 심지어 모용 덕이 세운 남연(398~410)같은 경우는 생존기간이 불과 12년이니 나라 수명이 금붕어 수명에 불과했다. 이후 남북조 시대를 거치게 되는데 이 시기도 혼란의 연속이었다. 약 100여 개 이상의 그렇고 그런 나라들이 생성소멸했던 시기다. 하나의 왕조가 쇠퇴하면 바로 그 지역 힘 있는 호족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581년에 양견이 비로소 나라다운 수나라를 세우고, 1대 황제인 문제가 된다. 그리고 589년에 중국의 땅을 다시 통일한다.

    창녕 척화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창녕 척화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진흥왕, 신라의 역사를 다시 쓰다

    6세기 중반 한반도에서도 신라 고구려 백제가 3국의 축을 이루고 가야연맹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지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진흥왕은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말년에 승려가 되었을 때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아버지는 제23대 임금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이다. 진흥왕의 출생연도는 ‘삼국사기’에 534년, ‘삼국유사’에 526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단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 진흥왕은 7세 때인 540년 법흥왕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불과 7세였다. 그래서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이듬해인 541년까지 섭정했고, 이어서 어머니 지소태후가 551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북방의 대제국 고구려와 해양대국 백제의 위세에 눌려 오랫동안 기를 펴지 못하던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왕 대에 이르러 국체를 정비한 다음 활발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특히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공격하여 요충지인 한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어서 그는 관산성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백제를 크게 위축시킨 다음 백제의 비사벌(창녕)을 공략하여 완산주(전주)를 설치했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에 있던 대가야까지 정복함으로써 신라 역사 이래 최대의 영토를 개척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피어난 신문명

    한반도가 삼국으로 대립하며 전쟁하는 동안 세계지도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웃나라 일본엔 처음으로 통일국가가 등장한다. 4세기 중반의 야마토국이다. 야마토의 왕은 ‘오오키미’라고 불렀다. 일본인들은 왕이나 족장을 ‘키미’라고 불렀으니 오오키미는 대왕쯤 된다. 그러나 제대로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지방호족들이 자신의 영토와 군사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오오키미의 권력은 아무도 눈치 보지 않는 권력이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무사들이 권력을 갖는 ‘사무라이 정치’로 진행된다. 지금도 일본의 천황은 정치적 권력이 없다.

    이 시기 눈여겨보아야 할 곳은 태평양과 아메리카다. 3세기 이후부터 중앙아메리카에서 문명이 탄생한다. 1세기 시작된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중앙아메리카에 도시문명들이 생겨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케추아족이 치아파스지역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마야문명이다. 무려 10세기까지 번성했었다. 이 무렵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도 낙원을 찾아 부족 이동이 시작된다. 오스트레일리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미크로네시아로 흩어져 천혜의 평화 속으로 스며들면서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제도의 역사가 시작된다. 단 그들의 낙원은 15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즉 대항해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였다.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통일신라의 기반을 닦다

    신라는 진흥왕의 시기에 한강 유역에 이어 가야 지역까지 점령하고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함흥 일대까지 차지하면서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일구었다. 진흥왕의 업적은 새롭게 영토로 편입된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지에 순수비를 세우면서 대내외에 과시되었다. ‘순수(巡狩)’란 본래 중국의 황제들이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지방을 시찰하며 민심을 돌보던 대규모 국가 행사였다. 진흥왕은 이를 본받아 새로 개척한 영토를 몸소 시찰하는 한편 강력한 정복군주로서 자신의 정책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순수비를 세웠던 것이다. 경주 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드디어 대제국 고구려, 백제를 내려다볼 정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니 실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제일 먼저 발견된 황초령비는 568년에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의의, 진흥왕의 업적과 순회한 목적, 수행한 사람들의 직위,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현재 마운령비와 함께 함흥역사박물관 본궁에 보관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창녕비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새로운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라는 뜻의 척경비로 이름 지어졌지만,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진흥왕순수비로 인정받고 있다. 이 비석에는 대가야 최후의 태자로서 월광태자로 불리는 도설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도설지는 562년 진흥왕에 의해 대가야의 왕으로 책봉되었지만 백제와 짜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뒤 왕위에서 끌어내려졌다. 결국 그는 승려가 되어 현재 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월광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진흥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43세 때인 576년 가을이었다. 그는 재위 37년 동안 신라의 전성기를 이룩했고, 영토의 확장과 대내외 국력 과시, 백성들에 대한 포용과 불교적인 교화를 실천했던 영걸이었다. 말년에 승려가 된다. 왕비인 사도왕후 역시 영흥사 비구니가 되었다.

    만옥정공원에는 진흥왕 척경비 말고도 조선 후기의 관아 건물인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퇴천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창녕 척화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등의 문화재가 있다.

    김홍섭(소설가)

    *퇴천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이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 일반형의 석탑으로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지고 상층기단(上層基壇)과 갑석(甲石) 일부가 부서져 없어졌다.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面石)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고,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창녕객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300~400년 전의 건축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 객사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창녕 척화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그 의지를 더욱 굳혀 국민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강력히 경고하고자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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