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II] 맛, 그리고...(4) - 대롱밥
- 기사입력 : 2002-03-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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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숲(竹林) 깊숙이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밖에서 보면 대도 가냘프고 키도 고만고만한 나무들이 둘러쳐 있어 평범
한 나무숲에 지나지 않아 보이던 것이,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줄기
가 어른 남자 팔뚝보다 굵어지고 키도 몇길 높이에 이른다.
빽빽히 들어찬 키 큰 나무들 덕에 햇볕은 땅까지 내려올 엄두도 못내고
고개를 직각으로 들어 올려다봐야 댓잎사이로 하늘을 겨우 볼 수 있다. 봄
햇살에 한두방울 흘렸던 땀방울은 어느새 대그늘 사이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씻겨가고 없다.
그러나 이쯤에서 잠깐, 눈을 감아보면 대밭의 묘미는 사실 시각적인 것
이 아닌 청각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쏴아아-쏴아아_달그락 달그락」
댓잎끼리 부딪쳐 쓸어주는 소리가 파도소리마냥 휩쓸고 지나가면 대나무
끝 줄기들이 살짝 부딪치는 소리가 여운으로 남는다. 대숲 한가운데에서는
이 소리말고는 어떤 잡음도 끼어들지 않는다.
대나무 많기로 이름난 하동의 지리산 자락. 그 중에서도 그 유명한 청학
동이 자리한 청암면은 천지가 대밭이다.
『문화는 잉여(剩餘)에서 온다』고 했던가. 음식으로 치자면 남을만치 생
산되는 재료가 그 지역의 먹을 거리와 연관이 된다는 얘긴데, 그 이론을 빌
리면 하동에서 「대롱밥」(대나무통밥)이 나온 것도 결국 이곳의 무성한 대
숲과 무관하지 않다.
대롱밥을 만들어 팔고 있는 강대주(52·청학동 동이주막)씨는 어린 시절
대롱밥을 이렇게 회상한다.
『가깝다는 악양장도 해뜨기 전에 출발해 잰 걸음으로 다녀오면 한밤중
이 될 정도로 깊은 골짜기니, 가뜩이나 없는 시절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
겠습니까. 널린 거라곤 대(竹)밖에 없는데 배고파도 그걸 먹을 순 없고. 골
짜기라 감자는 좀 나니까 대통 한 마디 잘라서 감자, 보리 같은 거 대충 섞
어 넣고 대통째로 구워먹었지요.』
그러나 지금의 대롱밥은 온갖 몸에 좋은 곡류들이 다 들어간 영양밥이
다. 본초강목 등 문헌에서는 대가 뇌졸중, 심장마비 등 「위급한 병」을 다
스리는 데 효험이 있고, 몸과 눈을 맑게 하는 약재라고 했으니, 먹을 때 한
결 건강해지는 기분을 들게 하는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대롱밥에 쓰이는 대나무는 보통 4~5년생이다. 대밭 한가운데 나있는 대나
무 중에서 적당히 굵은 것을 골라 넘어뜨리고, 이것을 다시 마디마디 자르
면 하나하나가 다 밥그릇이 된다.
쌀, 현미찹쌀, 조, 수수, 검정콩, 대추 등과 대나무숯을 대통에 넣고 이
것을 다시 솥에 넣어 1시간동안 지으면 대롱밥이 완성된다.
도시의 대롱밥집들은 손님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오리고기 등을 곁들
여 푸짐한 상을 내기도 하지만 산골의 대롱밥은 가격에 비해 박하다 싶을만
큼 풀 일색이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채취한 온갖 산나물을 모락모락 김나
는 대롱밥에 얹어 한술 가득 뜨면 자연의 향기가 말그대로 확 끼쳐오는 것
을 느낄 수 있다.
비우고 난 대밥그릇은 원하면 가져도 되고, 남는 것은 구워서 숯을 만든
다.
따뜻한 봄날 청학동도 구경하고 대롱밥도 맛볼 겸 이곳을 들렀다는 김영
학(56·진해시)씨는 『도시에서도 먹어봤지만 대나무 많은 곳에서 대롱밥
을 맛보니 감회가 다르다』며 깨끗이 비운 대통에 숭늉을 따라 후루룩 마시
고 아쉬운 듯 남은 산나물에 젓가락을 가져간다.
매스컴을 타 유명해진 훈장님 덕에 청학동에는 십여채의 옛날 서당이 들
어서 있고, 신식 가옥도 몇채 눈에 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보리감자 대롱밥」도 「영양만점 대롱밥」으로 바뀌었지만 서
울 사람, 대전 사람 할 것 없이 『여기서 대나무밥하죠?』라며 찾아오는
걸 보니 대롱밥은 분명 대나무의 고장 하동의 음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나
보다. 신귀영기자 beaut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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