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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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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시인이 찾은 합천 밀밭

  • 기사입력 : 2005-06-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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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빛 추억으로 나를 데리고…


        초여름의 합천 들판은 아름답고 가혹했다. 길게 늘어진 햇볕은 시간의 거죽을 달구고 또 달구어 들판을 익게 했다. 찔레꽃을 피게 했고 개망초꽃을 피게 했다. 누군가 떠난 자리에 또 누군가의 흔적이 남는 것처럼 봄이 떠난 자리에 여름이 성큼 들어왔다. 여름은 부글거리는 태양과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초록 사이에서 잠시 머문다. 폐허와 혼돈이 결혼생활처럼 사납게 우리를 스쳐갈 때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여름은 짧은 한 때의 폭우보다 긴 무더위로 기억에 남는다.

        나는 무엇을 보러 이곳까지 내달렸던 것일까. 며칠 전에 왔을 때보다 더욱 더 누렇게 익어있는 밀밭 앞에서 나는 황망해졌다. 나에게 아직 순수에 대한 굶주림이 남아 있다면 그곳의 배경은 보리밭이거나 밀밭이리라. 그러나 나에게 보리밭이나 밀밭에 관한 추억은 남아있지 않다. 설익은 밀을 불에 구워 입가에 시커멓게 묻혀가며 먹는 ‘밀사리’에 관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보리밭이나 밀밭에 서면 이상한 굶주림을 느낀다. 순수와 자유에 대한 그리움. 내가 통과해 온 것들. 그리고 내가 앞으로 통과해야 할 것들이 아득하다.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흘러갔다고. 저 꽃들이 내 몸에 닿지도 않고 사라졌다고 쉽게 말해 버릴 수는 없으리라. 나는 시간의 꽃들을 짓이겼고 꺾었고 버렸다. 그때마다 무언가 밀려옴을 느꼈고 황망하게 또 누군가 떠나는 것을 느꼈다.

        소멸로 치닫는 광활한 들판

        '자연의 집' 되어버린

        우리밀 공장엔 황황한 바람만

     

        강렬한 태양아래서 두 눈을 찡그리고 출렁이는 밀밭을 바라보았다. 생의 절정에 도달한 밀들은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소멸로 치닫는 광활한 들판이다. 생각해보면 저 밀밭은 농민들의 애달픈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입농산물에 밀려 우리 농산물이 서야 할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밀밭 한 가운데 문 닫은 우리밀 가공공장이 있다. 폐교였던 곳을 개조해서 사용한 모양이다.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깨진 유리창과 벽을 타고 올라간 넝쿨식물들이 밀림을 연상시킨다. 건물 안을 차마 들여다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만다. 자연의 집이 되어버린 우리밀 가공공장에 바람이 분다. 누구나 자기 삶을 지탱할 희망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지만 마당 구석에 세워진 낡은 트럭 한 대는 오래 전에 제 할 일을 잊어버린 듯 하다. 

        밀을 오래 씹으면 껌이 된다지.
    밀 이삭을 까본다. 까슬까슬한 껍질 안에서 하얀 알맹이가 나온다. 이게 어떻게 껌이 된다는 거지? 밀에 관한 추억 한 자락도 없는 나는 갑자기 아득해져 버린다. 추억 앞에서 나는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발을 헛디뎌 갑자기 낯선 간이역에 서 있는 기분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이 흘러가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한참을 걸어가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어딘가에 당도해 있다. 지금 주저앉아 있는 이 자리가 내 운명인 것이다.

        야생의 들판에는 식물도감에서 몇 번 본 듯한 꽃들이 지천에 피어있다. 태양은 도무지 졸아들 것 같지 않고. 뜨거운 햇볕들은 온 몸에 쏟아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밀 이삭은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진다. 밀밭 이랑을 걸었더니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곧 허방을 짚고 만다. 밖에서 보면 한없이 부드럽게 출렁이던 밀들이 막상 밀밭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칠기 짝이 없다. 거대한 건초더미를 지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다. 태양의 잔해가 툭. 떨어진다면 순식간에 거대한 불길이 번질 것처럼 밀밭은 위험하다. 누런 이삭에 무당벌레 한 마리가 불씨처럼 남아있다.

        밀들을 수확하고 나면 저 들판은 바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소멸한 자리를 채우려고 바람이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자연의 신발을 신고 추억이 처음 시작된 곳에서 추억이 끝나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 분명하다.
        ▲박서영 시인은 경남 고성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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