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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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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억을 찾아 (24) 산청 단성장

  • 기사입력 : 2005-08-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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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트 가면 다 있는데 누가 장에 올라카나"


      “장에 왔소.” “예. 장에 왔소.”
      “더운데 어찌 지내요.” “잘 지내요.”
      “볼일 보다 가소.” “아~ 예.”

      할머니들이 나눈 단 세 마디. 5일장의 구수한 모습을 압축한 듯하다.
      산청 단성장. 오락가락하는 비 탓인지 장터는 한산한 편이다.

      시장 번영회 조경윤(70) 회장의 뒤를 따라 먼저 근처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점심 때가 멀었지만 벌써 한 잔 하고 있는 손님들도 있다.
      “시골시장이 활성화 돼야 농촌경제가 삽니다.”

      보따리 장사를 40년간 해 오다 수년 전에 점포를 얻어 이불점을 하고 있는 양이환(65)씨는 시골장을 살리는 해법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옆에 앉은 번영회 총무 이정희(60)씨도 한 수 거든다.

      “군에서 셔틀버스를 운행하여 촌에서 살고 있는 노인들이 장날에 편하게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비오는 날도 불편없이 장을 볼 수 있는 시설이 보완되어야 한다. 대형마트 허가를 규제해야 한다” 등등 그동안의 불만을 털어 놓는다.

      그러면서 최근 재래시장 활성화 정책에 대해서도 한마디 한다. 무조건 밀어붙이지 말고 장의 정서에 맞는 특화된 상품이나 풍물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조경윤 회장은 “단성장은 원래 도천변에 섰다. 그때의 이름은 순우리말로 도내장. 그래서 지금도 도내장으로 많이 불린다”고 한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손님들이 밀어 닥친다.

      도천변에 장이 서 '도내장'으로 불려

      입구엔 인근 마을 아낙들 노점 차려놓고

      안쪽엔 걸어물·잡화·철물점 등 늘어서

      "장사 할라꼬 오나… 사람 그리워 오지"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

      그나마 단성장은 시장 현대화 작업으로 비가 와도 큰 불편함 없이 장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시장 주변 가축병원과 부동산사무소는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단성장은 면사무소 앞에서부터 시작된다. 외지에서 온 상인들이 약 100m 정도의 시장통에 노점을 차려 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인근 신안면에서 직접 재배한 무. 배추. 마늘 등과 나물류를 가지고 나온 아낙네들이 앞쪽에서 전을 펼쳐놓고 있다. 아직 마수도 못했다며 열심히 손님들을 부른다. 시장 안쪽에는 건어물. 잡화. 신발. 철물. 피복점 등이 자리 잡았다.

      단성장에는 3대째 건어물상을 하고 있는 상점이 있는데. 지금은 며느리가 맡고 있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60년간 붙잡고 있던 건어물을 놓아 버리기 어려워 장날에 문을 연다고 한다.

      이 아낙은 “농협에서 멸치 등 건어물뿐만 아니라. 잡화까지 취급해 더욱 더 장사하기 어렵게 됐다”면서 하소연을 한다.

      옆집 신발점. 그릇점 할머니와 주변 아저씨들도 “요즘 장사가 되지 않아 옛날처럼 밀가루 한 푸대씩 배급을 받아야 살 수 있을 지경이다”고 한숨을 내쉰다.

      또 원지에서 왔다는 한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아침에 장사 끝내고 하루 종일 선술집에서 대포 한잔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는데 지금은 집에 있자니 심심해 장에 나온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사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소식도 알게 되고 간혹 옛 친구들도 만나는 재미는 장터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고 말한다.

      이곳의 점포는 대부분 장날에만 문을 열지만 별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5일장의 모습이 많이 변해가고 있다. 만남의 장소요. 술 한잔 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서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차츰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오고 파장 무렵이 되어가자 물건 값은 절반으로 내려간다. “문어 2마리 1만원. 떨이요 떨이.” 그러나 억수같은 빗줄기 속에 공허함으로 되돌아올 뿐 단성장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이종훈기자 leejh@knnews.co.kr

      <장터 사람들> 대장간 하화순씨

      3년전 남편 세상 떠난 뒤 망치소리 끊겨  "40년 명성 아직도 단골 발길"

      “낫. 호미 등을 보면 영감 생각이 나지요.”
      단성장에는 3년 전까지 만해도 쇠벼림 소리가 울려 퍼지는 대장간이 있었다. 이복술씨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인인 하화순(69)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풀무질도 망치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아직도 대장간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영감이 세상 버릴 날을 미리 알았는지 몸이 아파도 계속 일을 하더니만 내가 먹고 살만큼 저렇게 많은 물건을 만들어 놓고 먼저 갔지요.”

      할머니는 낫. 호미. 칼 등 할아버지가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물건을 가리키며 눈시울을 적신다.
      3년 동안 장날에만 문을 열고 계속 팔았는데도 아직 수백 자루는 족히 남아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마침 손님들이 들어 왔다. 하동 양보에서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농기구를 사러왔다고 한다.

      일행 중 한 아주머니는 “예전에 아는 분이 이곳에서 낫을 샀는데 품질이 너무 좋아 다른 낫은 쓰지도 못하겠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칼. 호미. 낫. 쇠스랑 등을 고른다.

      조금 비싸지만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는 것이다.

      “영감이 살아있을 때에는 방송. 신문사에서 많이 취재를 하곤 했지. 대장간을 계속하고 있는 곳이 드물고 품질이 좋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그런 것 같아.” “어떤 분은 여기서 산 낫을 20년간 쓰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지.”

      할머니의 이 상점은 간판도 없고 허름하지만 할아버지가 40년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면서 열심히 일한 덕택에 하동 진주 등 멀리서도 알고 찾아오고 있다.
    할머니는 이 물건이 다 떨어질 때까지 문을 열어놓겠다고 한다.

      호미. 낫. 도끼. 칼. 쇠스랑. 곡괭이 등 수백개의 농기구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종훈기자 leejh@knnews.co.kr

      <단성장은>
      단성장은 원래 도천변에 섰다. 그때의 이름은 순 우리말로 도내장. 지금도 도내장으로 많이 불린다. 그 이전에는 적성시라 했는데 이는 1871년에 발간된 영남읍지에 기록돼 있다. 100년 전까지 있었던 도내장은 구한말에 단성면 성내리(지금은 농경지)로 옮겨졌고 다시 85년 전에 지금의 단성초등학교 부근에 있다가 60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추억을 열며>
      본지 85년 11월 29일자에는 ‘지금 운영되고 있는 대장간의 주인인 이복술씨는 장날마다 문을 열어 하루 종일 일하는게 힘겹지만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도리없는 일이라며 기술을 넘겨주지 못하는게 안타깝다고 한다’고 게재되어 있다. 지금은 대장간이 없어지고 이씨가 만든 농기구를 할머니가 대신 팔고 있다.

      <장터구경도 식후경>
      장터의 단골메뉴는 역시 국밥. 이곳에도 장월출(65)씨가 40년 전부터 국밥집을 하고 있다. 이름은 ‘시장국밥’. 지금은 딸과 함께 하는데 돼지국밥(4천원). 내장국밥. 순대국밥을 내놓는다. 수북한 고기와 구수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주변 볼거리>
      ▲목면시배유지=
    단성면 사월리에 있다.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이 태어난 곳인 배양마을은 지금까지도 목화 재배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가 오른쪽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싼 100여 평의 밭이 있다. 밭 옆에는 기와지붕을 한 비각 안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지’라는 제목의 비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조식 유적= 조선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유적으로 시천면 원리에 있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이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겁외사. 성철대종사 생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스님 생가와 겁외사가 있다.
      성철대종사의 부친인 율은 이상언옹의 호를 따 율은고택으로 명명한 생가는 크게 유물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으로 구분된다.

      유물전시관에는 성철스님이 평소 지녔던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비롯하여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채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은 성철스님의 생가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한옥의 형태로 이루어진 기념관이다.

      겁외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서 늘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성철대종사의 수행자적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대웅전과 선방. 누각. 요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김소석 화백이 그린 성철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주말 열리는 장>
      ▲8월 20일= 진주 미천장. 진해 마천장. 사천 사천·곤양장. 김해 진례·불암장. 밀양 송백장. 양산 물금장. 의령 칠곡장. 함안 가야장. 창녕 영산장. 남해 무림장(이동). 하동 횡천·계천장. 산청 차황·단성장. 함양 마천·안의장. 합천 가야·초계장.

      ▲8월 21일= 창원 신촌·가술장. 진주 금곡·대곡장. 사천 완사장. 밀양 무안장. 의령 궁류장. 함안 대산장. 고성 고성장. 하동 화개·악양·고전장. 산청장. 거창장. 합천 묘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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