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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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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연 시인이 찾은 삼랑진역

  • 기사입력 : 2005-10-13 00:00:00
  •   
  •   떠나버린 기차 철 지난 옛사랑의 노래

      봄이었던가
      강물 말랐던가 흐르고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매화꽃 피어 빈 들판 적시던
      매캐한 연기속에서도
      마음 해맑았던가
      그와 나란히 걷던 둑길
      참으로 나른했고
      그렇게 삼월은 왔던가
      철교를 지나 
      기차가 가고
      상심한 목소리 기차가 가고
      그 때 나는
      눈감고 있었던가
      눈뜨고 이별하는 사람들 등 바라보며
      측백나무 울타리
      변명처럼 손 흔들어
      돌아나왔던가 

       김혜연  ‘삼랑진역’

      그와 걷던 둑길 긴 꼬리 기차…

      기억 속엔 푸른 청춘의 역이

      느리가 낡아가던 추억 감쪽같이 사라지고

      무관심한 척 강물만 흐르는데…

     

      어렴풋이 이르게 핀 매화 한 가지를 꺾었던가 아닌가. 가물 가물거려도 분명한건 손잡고 긴 둑길 두려운 침묵으로 걷고 있었다는 거지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한림정역에서부터 삼랑진역까지 배경은 들을 태우는 깊은 냄새와 흐르지 않는 듯 흐르던 아득하고 고요한 강과 흩어진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철교 위를 장난감처럼 지나가는 긴 꼬리 기차가 넘쳤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은둔한 제 기억 속에는 아직까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푸른 청춘의 역이 숨어 있어서 ‘안녕 첫사랑!’ 속엣말로 천천히 불러도 귓가를 지나가는 바람마저 오랫동안 서러워지며 남몰래 눈시울 붉어지는 얼굴이 먼저 당도합니다.

      꽉 짜인 사각 틀을 가진 추억은 풀리지 않는 숙제 나누어 가진 듯 호박쌈 함지박 만하게 싸서 입 속 함부로 밀어 넣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된 지금껏 무겁고 감당하기 버거워 다시 한 번 옷 가지런히 여미어봐도 여전히 이마가 서늘해집니다.

      세월은 가끔 엉뚱하게도 가만히 있는 모든 사유들을 흔들어 뒤죽박죽 뒤엉켜 놓은 채 제자리 당황해서 잃어버리게 만드는 심술부립니다. 아무도 듣지 않겠지만 저는 지금 이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지우지 않고 떠났던 철교. 강둑. 모래밭. 좁은 골목길. 이발소. 약방. 종묘농약상. 다방 등 삼랑진역전 그리운 이름들 앞에 어릴 적 불꽃놀이를 하듯 설레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점. 선 어느 것 하나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게 작은 쉼표를 이룬 마을 안과 밖이 한꺼번에 달려 나와 마치 둥글고 결 고운 형태와 무늬로 스크럼을 짜며 저마다 소리 높여 돌림노래로 아우성을 칩니다. 숨어서 눈치 보던 비겁한 열정 열정마저 파닥파닥 대가리 치켜들어 약 올리고 꽁무니 빼곤 합니다.

      이별과 만남이 늘 술렁이던 광장 한 켠 개찰구를 지켜 섰던 튼실한 나무가 깨끗하게 닦아놓은 그림자같이 스-윽 지워지고 모양새 없는 벤치는 적막하던 길 밖으로 기우뚱 달아난 지 오래 전 측백나무 울타리 통째로 없어진 뒤 마지막 상행선 기차는 손님을 모두 버린 채 우울하게 떠나고 떠났습니다.

      이럴 수가! 느리게 낡아가던 소식들이 모두 깜쪽같이 백주대낮 순식간에 제 눈앞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아! 오늘 제가 만난 신기루 같이 어지러운 이 슬픔의 소금 기둥을 어떻게 무너지지 않게 다시 세워야 할까요.

      그대에게 당혹스러움을 기어이 말하기 전에 먼저 성격 급한 세월 뒤를 따라 늙어가던 추억은 여름이어도 겨울이어도 달콤한 심장을 나누어 가진 여기 이 땅은 여전히 변함없이 봄이리라 굳게 믿은 것이 솔직히 어리석은 병이었습니다.

      아직도 키 큰 남자 등판만 보면 힘껏 후려치며 낯설고 질퍽거리는 세상 그래도 그대 발자국 소리와 상처 없이 당당히 걷고 있다 철없이 큰 소리로 말하고 싶은 욕심도 치유할 수 없는 병입니다.

      다시 한 번 잘 지내겠지요 첫사랑.

      너무 멀리 떠나온 뒤에야 비로소 깨달은 뭍의 소중함. 고장 나 열리지 않는 서랍 속에 숨은 작은 열쇠 같이 때늦고 케케묵은 연애편지라 믿어지지 않겠지만 유치하고 간지럽다 밀쳐두지 마시고 이별을 가볍게 여겨 뒤늦은 회한에 잠긴 저에게 그만 한 치의 틈없이 본때를 보여주며 잘 살아가십시오.

      잘 익은 해가 물컹물컹 저물 때마다 뜨겁게 껴안고 뛰어들어 죽고 싶다 말하던 여기 삼랑진 가까이 만어사 일만 개 바위보다 더 갈증 난 그대의 떠도는 땅.
    덜 익은 경험으로 나누던 풋내 나는 이별조차 이제는 나비 날갯짓보다 가볍게 풀어놓는 낙동강이 저만치서 흘깃 무관심한 척 너그럽게 흐르고 있습니다. 빈 낙동강 역이 하루에 몇 번 기억하는 무궁화호 손님들을 기다리는 동안 와아아아----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때 묻지 않은 발자국을 찍는 모래밭 적막뿐인 귀 일으켜 세우자 주위가 때맞추어 붉어집니다.

      그날 분명 이르게 핀 매화 한 가지 꺾어들고 오래 오래 저물도록 보고 보았지요 우리?

      ▲김혜연 시인은 마산에서 태어나 1993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5인 시집 ‘시인은 다섯 개의 긴 더듬이를 갖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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