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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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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호 시인이 찾은 하동 섬진강

  • 기사입력 : 2005-11-10 00:00:00
  •   
  •  뜨거운 역류를 꿈꾸며


      반역. 이란
      저런 것이다.

      시퍼런 비수 한 자루
      가슴에 품고
      상류로 상류로
      천년이고 만년이고
      처단할 모가지를 찾아
      온몸으로 밀고 가는
      뜨거운 잠행(潛行)! 


      -김남호. ‘섬진강’ 전문

      섬진강은 진안군 백우면 원신암 마을에 있는 ‘데미샘’의 찰랑거리는 한 바가지 물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뉴월 시냇물들을 이리저리 끌어 모아서 곡성 지나 시월의 강이 되고. 구례 지나 지리산 에둘러 백운산 만나면 십일월의 강이 된다. 울긋불긋 술 취한 십일월의 강은 피아골로 갈라지는 ‘토지검문소’ 앞에서 바짝 긴장한다. 어떤 이는 이 강을 역사라고 하고. 어떤 이는 민중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문학이라고 한다. 아래로만 흐른다고 비굴이라고 하고. 누런 흙탕물이 몸을 뒤채는 오뉴월에 눈알 한번 희번덕이면 둑 너머 사유재산들 다 접수해버린다고 혁명이라고 한다. 자고로 명쾌하게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불온한 법!

      그렇다. 내게 섬진강은 도대체 하나로 정의될 수가 없는 불온한 강이다. 여전히 역사의 강이고 민중의 강이고 표준말을 모르는 농투성이의 강이다. 내 말에 동의하기 어려우시거든 시퍼렇게 독이 오르는 저물녘의 섬진강을 보시라. 지저귀던 물새들 다 돌려보내고 사위가 어두워지는 시간을 노려. 예각으로 벼른 비수 한 자루 지닌 채 북북서진하는 저 의심 많은 강을. 밤새 상류로 상류로. 한양 쪽을 향해 달리다가 아침이면 기진해서 떠내려 오는 강. 몇 날 며칠 곡기 끊고 신음만 흘리다가 다시 몸 추스르면 비수부터 가는 강을. 이런 탓에 내게 섬진강은 허옇게 쇳물 흘리는 숫돌의 강이다. 숫돌 같이 차가운 강이다.

      숫돌 같이 글썽이는 강이다. 하동장날 월선이 집에 들러 대포 한 잔 걸친 용이가 고등어 한 손 들고 평사리로 돌아가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꺼이꺼이 울던 단장(斷腸)의 강이고. 이복이모를 연모하다 상사병이 난 성기(性騏)가 엿판 하나 챙겨들고 휘청휘청 하동길로 내려오던 역마(驛馬)의 강이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두치(하동읍 해량동)의 친구집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이튿날 해진 짚신을 질질 끌며 굽이굽이 노량으로 돌아가던 절망의 강이다. 절망으로 깊이를 만들고 체념으로 너비를 만든 강. 차안(此岸)만 있고 피안(彼岸)은 없는 강이다.

      어디 그뿐인가. 섬진강은 선거만 치르면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전선(戰線)이고. 그 선거가 빚어내는 권력과 욕망의 뒤틀린 등고선이 어색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이러니 어찌 섬진강에서 문학과 역사와 정치가 다른 몸으로 분리되기를 바라겠는가.

      한때 나는 저 섬진강으로 나를 정의하고 싶었다. 내가 섬진강이고 섬진강이 나였으면 싶었다. 그러나 가둘 수 없는 풍경으로 정체성을 삼으려던 자는 불우했다. 이 풍경은 겉으로 보기에는 엉성하고 포근해 보였지만 너무도 완벽하고 매몰차서 나는 떠나지도 못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가까우면서도 아득했고. 아득하면서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한번쯤 돌아볼 것 같으면서도 차가운 낯빛으로 외면했고. 싸늘하게 돌아서는 듯하다가도 부르면 느릿느릿 대답해주는 그리움의 거리로 나를 떼어 놓았다. 그것은 해소되지 않는 갈증의 거리였고. 끝없이 나를 무릎 꿇게 하는 짝사랑의 거리였다. 또한 그것은 섬호정이 만드는 노을의 장엄함에서 출발하여 향교 대밭에 삐죽삐죽 솟아오른 죽창 같은 죽순의 서늘함에서 끝나는. 가슴과 머리 사이의 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수 없는 절대의 거리는 절망을 낳기도 하지만 낭만을 낳기도 하는 법. 하류의 섬진강은 화류(花柳)에서 늙은 여인 같은 표정으로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 허허로운 물결의 주름은 쓸쓸하고 아름답다. 이것은 하류의 강만이 가질 수 있는 너그러운 자태이다. 이런 탓에 섬진강 하류의 물빛은 흐릿하고 축축하게 짓무른 늙은이의 눈빛에 닿아 있다. 그 눈빛은 더디게 더디게 흐르다가 어느 순간 순하게 소멸할 것이다. 잔망스럽게도 나는 한때 섬진강의 하류에 일신을 의탁한 채 내 여생의 시간이 저와 같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그때는 이쪽에서 ‘진로(眞露)’를 마시다가 강을 건너서는 ‘보해(寶海)’를 마시던 소주병 같이 푸르고 겁 없던 시절이었다.

      이제 곧 섬진강은 평사리를 지나 하동송림을 크게 휘돌면 십이월의 강이 될 것이고 이내 망덕포구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 석 자도 쓰실 줄 모른 채 캄캄하게 저물어버린 일자무식 내 아버지 같은 강이 되어 시린 겨울바다에 부르튼 발을 담글 것이다. 그러나 강이란 물결이 흐르는 방향과 상징이 거느리는 방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섬진강의 매서운 기개는 편안한 순행을 거부하고 한겨울의 강바람 속을 뚫고 섬진강 다리를 건널 것이고. ‘신원검문소’가 그 앞을 사철 지키는 허름한 ‘신원반점’의 붉고 뜨거운 짬뽕국물 속으로 깊이깊이 잠행할 것이다. 그렇게 섬진강은 허기진 우리의 내장을 적시고 식어가는 우리의 심장을 데우며 낡은 19번 국도를 옆구리에 낀 채 유유히 역류하리라.

      ▲김남호 시인은 경남 하동에서 출생.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문학평론. 2003년 ‘조선문학’으로 시 등단. 현재 하동 옥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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