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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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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영숙 시인이 찾은 마산 구복해안

  • 기사입력 : 2005-12-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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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몰의 그림자에 묻어온 그리움


      어딜 가서 
      주머니에 담긴 상처 털어 낼까
      갯내음 질펀 나는
      포구에서 실토하라고
      소금기 묻은 바람이 먼저 능선을 넘는다

      백령고개 골진 길을 함께 했던 얼굴들과
      잊혀진 이름들이 가만가만 걸어와
      길섶에
      긴 그림자를 끌며
      어깨를 짚는다
      -옥영숙 <욱곡의 얼굴> 중에서-

      여정은 어느 계절 상관없이 비밀한 아름다움을 지녔다.(위 사진은 옥영숙 시인이 마산 구산면 욱곡 해안로를 걷고 있다./김승권기자)

      백령고개 골진 길을 따라 그대를 만나러 간다. 내 마음의 불편한 가지 끝에서 기다리는 일 하나로 서 있는 그대. 자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 언제나 넉넉한 가슴으로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는 바다는 그리움의 힘으로 꿈틀댄다.

      저도 연륙교는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와 저도를 잇는 다리이다. 저도 연륙교는 제2차 세계전쟁 때 군수용 보급철도 건설로 일본군과 영국군의 갈등을 그린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다리와 모양이 흡사해 일명 콰이강의 다리라 불린다.

    (사진:옥영숙 시인이 마산 구산면 저도 구 연륙교(일명 콰이강의 다리)에서 신연륙교를 바라보고 있다./김승권기자/)

      그보다는 ‘인디언 썸머’라는 영화 속에서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아름다운 사형수(이미연 분)와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친 변호사(박신양).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떠난 이틀간의 여행 장면이 떠오른다. 그들이 찾아온 곳이 저도 연륙교라 더 친근하다. 늦은 가을날 문득 여름처럼 찾아오는 따뜻한 사랑. 인디언 썸머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을 누구나 열망하는 것이다.

      몸이 날아갈 정도로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철교 마루. 빨간색 철제 다리는 정면으로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을 펼쳐 보인다. 다리 밑으로 흘러가는 겨울바다를 내려다보면 다리아래는 협곡의 계곡물처럼 쪽빛 바닷물이 갯내음을 몰고 유장하게 흘러간다. 다리 높이가 현수면 위로 30m 정도 되니 다리 위에 서면 물빛이 너무 환해서 현기증이 난다.

      파도를 빨판으로 조그맣게 암호처럼 떠 있는 부표(浮標). 이 부표는 항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연인이 손잡고 이 다리를 끝까지 건너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연륙교에 얽힌 속설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이 닻을 내리길 비는 맘과 닮았다.

      제 몸 하나 꼿꼿하게 일으켜 세우기 힘든 계류부표는 바다에 갇힌 수많은 사연들을 파도로 흔든다. 앙증스런 종처럼 꽃등을 밝혀들고 꽃잎은 바람 없이도 딩딩거리며 연인들의 가슴에 분홍색 문장을 새긴다.

      얼마 전 다리의 안전문제로 마산의 시조인 괭이갈매기를 닮은 새 저도연륙교가 개통됐다. 전에는 좁은 보폭으로 차가 지나가면 다리의 출렁거림과 연인들이 손잡고 건너기에 위험했던 추억의 옛다리는 생의 한때가 꿈처럼 지나가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피곤한 몸을 부린다. 묵묵히 철교가 지닌 옛길의 무수한 기도문이 침묵으로 견디어 낼 때 다리 아래를 오가는 통통선이 거친 숨소리를 낸다.

      저도 연륙교를 뒤로하고 구복. 반동을 거쳐 500m정도 오면 삼거리에 욱곡이라는 곳이 나온다.

      욱곡에서 일몰의 뿌리는 바다다. 바다는 하루를 숨죽이고 일몰을 배양한다. 날이 저물면 동그란 얼굴로 제집의 닫힌 문을 열듯이 내려온다. 바로 앞 닭섬과 북섬. 수우도를 배경으로 내려앉는 일몰은 노을빛 이불로 겨울바다를 따뜻하게 덮어준다.

    (사진은 마산 구산면 저도 연륙교(일명 콰이강의 다리)를 걷고 있는 옥영숙 시인)

      해가 기울 때를 대비하여 가만 엎드려 쉬고 있는 바다는 황금빛 그늘로 너흘거린다. 왼종일 배회하던 목선도 젖은 몸을 말리려 집으로 돌아오면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붉은 해는 마구 숨이 가빠져 눈사람처럼 녹아내린다.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젊음이 필생의 힘으로 빛이 되는 일몰. 온 몸으로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한 무심한 나의 사랑처럼 물속의 집 한 채로 닻을 내려 어떤 기쁨으로도 형용될 수 없는 상처의 시간을 뒤집어쓴 채 시린 파도로 가슴을 철썩거린다.

      욱곡 그 이름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그 이름에 새겨진 물결무늬를 누구도 끊지 못한다. 홍근한 수면이 흔들리면 이끼 덮인 지난 환영의 날들이 오소소 일어난다. 가슴께 숨긴 무수한 빗금이 띄엄띄엄 파문을 새기고 물결 위로 저녁 햇살이 겹쳐 떨린다.

      겨울해는 사랑하고 잃어버린 추억들이 뿌리를 내리고. 그 추억의 무게는 일몰의 그림자에 묻어서 점점 덩치가 커지고 길게 이어진다. 한없이 고즈넉하고 넓은 바다에 꽃 한 송이가 붉디붉은 속을 터트리는 터에 지난날 미처 다 챙기지 못한 그리움으로 생눈이 아린다.

      서둘러 욱곡의 저녁을 통과하고 싶다. 오래된 흉터를 쪼아대는 겨울 해의 넋과 바람이 욱곡의 아픔이다. 사랑의 환상은 짧고 상처는 깊어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비밀한 아름다움으로 굽이치며 자맥질을 한다. 슬픔도 견뎌내면 힘이 된다는 것은 제 속에 간절함을 품은 까닭이다. 이 세상에서 갖지 못할 빛깔로 표류하는 비밀경전처럼 욱곡에서는 아무리 오래되어도 썩지 않고 이슥토록 꺼지지 않는다.

      어둠을 등 뒤로 하늘 한쪽 바라보니 홀연히 떠오르는 갈매기떼. 필사적으로 더 힘차게 날아오르는 내력을 알 수 없는 갈매기 한 마리가 눈 맞춤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멀리 사라져 간다. 도저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내 그리움의 송신은 갈매기의 암호문으로 서로의 마음 안쪽을 쓰다듬으며 든든한 배경이 된다.

      옥영숙 시인은 마산 출생으로 200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01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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