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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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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시인이 찾은 마산 무학산 서학사

  • 기사입력 : 2006-01-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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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이 운다 서학사에는 학이 살지 않거늘…


      원래 없는 것들도
      없어 서운한 것은
      손닿는 것만이 아니라고

      한 고비 마음을 따라 오르는 산길
      저기 옹이가 많은 남기 마음에 걸리고
      발을 자주 거는 돌멩이에 마음이 쓰이고
      산은 저긴데 생각은 허공
      길은 가는데 마음은 따라주지 않아 괴롭다고
      생각이 없는 마음을 풀어놓으면

      문득
      하늘을 채웠다가 비워내는 구름과 달
      산을 채웠다 비워내는 풀과 꽃

      원래 없었던 것들도 돌아와 빈자리를 채우고
      원래 채워진 것들도 비워져 빈자리를 만드는
      없던 마음과 비워진 생각들이
      잊고 지내온 서운한 것들을 만나려 가는 길

      棲鶴寺에는 鶴이 살지 않는데
      鶴이 운다

      성선경 <서학사 가는 길> (전문)

      세상의 모든 풍경(風景)은 기억이다. 풍경(風景)에서 우리가 읽어내는 것은 상처와 추억의 기억이다. 숲과 산길을 걸으며 내가 읽어내는 것은 나무와 돌의 형상이 아니라 넝마처럼 낡고 닳은 상처와 추억이다. 이미 학(鶴)이 살지 않는 서학사(棲鶴寺)의 숲길을 오르며 내가 읽어내는 풍경도 학(鶴)에 대한 추억(追憶)과 학(鶴)을 잃어버린 절름발이의 상처다.

      불혹(不惑). 하나의 미혹함도 없는 나이라 공자님은 불혹이라 칭하셨는데 나는 흔들리고 미혹함에 빠져서 흔들리고 무너졌다. 한 번 무너진 삶은 낡은 청바지 같이 가로로 세로로 쭉쭉 찢어졌으며 오래된 성곽처럼 무너져 내렸다. 나의 불혹은 미혹(迷惑)함의 극치였다. 나는 무너졌고 고장 난 기관차처럼 멈췄다.

      나는 지난 오륙년. 이 산길을 오르며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다스렸다. 회한과 분노를. 희망과 용서를 뿌렸다 거두어들이며 학(鶴)을 찾아 오르곤 했다. 어느 시인은 불혹(不惑)을 부록이라 명명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아아 이제 내 삶도 부록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부록의 삶. 이미 내가 살아야 했던 삶의 한 판은 끝나고 이제 남은 것은 부록일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새 부록이 되어있었다. 김해에 사는 박병출 시인은 불혹(不惑)을 물혹이라 정의했다. 없어야 될 것이 생겨나 물컹거리고 거북스럽게 달려서 마음을 쓰이게 하는 나이. 나는 다시 혹부리영감처럼 도깨비라도 찾아나서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십여 년을 살아오며 내가 원해서 또는 원하지 않아도 갖게 된 수만 가지의 물혹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나는 보이지 않고 물혹들만 보인다. 나는 이제 커다란 물혹덩어리이다.

      풍경이 시각에 의한 외면의 언어(言語)라면 상처와 추억은 내밀한 내적 언어이다. 외면의 언어와 내면의 언어. 겉과 속이 서학사를 오르며 나누었던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지금 다시 솔바람처럼 살랑거린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나이가 지금 불혹이든 물혹이든 부록이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지금 어디인가?

      나는 수도사를 지나 산길을 올라 서학사를 거쳐 관해정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좋아한다. 이 코스는 오르는 산길이 어머니 품처럼 아늑해서 좋고 풍향계에 올라서 보는 마산의 풍경과 바다가 아름다워서 좋다. 여기서 보는 마산의 풍경은 성형미인을 뺨치게 아름답다. 상처도 때로는 아름다운 무늬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산의 바다와 돝섬. 너무 잠잠하다 싶은 마산의 바다를 볼 때마다 나는 그림 같다거나 호수 같다거나 하는 아름다운 생각보다는 고여서 이제는 침잠하는 낡은 우물을 생각하게 된다. 오! 숨을 멈춘 바다. 이제는 호흡이 끊어져 산소호흡기에 몸을 의지해야하는 바다. 그러나 나는 돝섬을 볼 때에는 다르다. 한 마리의 돼지를 연상하기보다는 한 마리의 고래를 연상하게 된다. 아 저기 망망대해로 헤엄쳐나갈 한 마리의 큰 고래. 숨을 멈춘 바다와 망망대해로 나갈 고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부조화를 나는 마산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서학사에는 학이 살지 않는 것일까?

      나의 불혹도 이제 끝이 나 간다. 아마 공자님께서 불혹(不惑)이라 명명했을 때 가장 미혹(迷惑)함이 많은 나이라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해야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아무 이룬 것 없는 나이만 계속 쌓인다.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서둘러 하산을 준비한다. 이제 내려가면 다시 산길을 오르듯 살아야겠다. 천명(天命)을 아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솔성(率性)하는 것을 도(道)라 했는데. 천명(天命)은커녕 나는 아는 것이 너무 없다. 관해정 앞 은행나무가 보고 싶다.

      성선경 시인은 1960년 창녕에서 태어나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文·靑> 동인이며. 시집 <널 뛰는 직녀에게>. <옛 사랑을 읽다>. <바둑론> 등이 있다. 현재 마산 무학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무학산 서학사 가는 길에 동료교사와 동행을 했다. 오르고 내려가는 1시간 남짓. 그들의 뒷모습은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다가왔다. 그리고 꿀맛 같은 약수 한 사발과 국밥 한 그릇…. 동료가 있어 행복한 하루였다.

     (사진: 성선경 시인이 시원스럽게 펼쳐진 무학산 서학사 쪽의 봉우리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무학산 서학사 앞에서, 서학사쪽 봉우리에서의 성 시인.(사진 맨 위에서 부터) /이종훈기자 leej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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