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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60년 30대 뉴스 (2)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

  • 기사입력 : 2006-02-27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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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중이던 1952년 공산군 포로를 집단수용하고 있던 거제도에서 발생한 포로들의 폭동사건.(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


    1951년 만들어진 거제도포로수용소에는 당시 13~14만여명의 포로들이 수용돼 있었다. 포로들은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공산포로와 돌아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 등이 뒤섞여 있었다. UN군측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 의사에 따라 한국. 북한. 중국. 또는 대만을 선택할 수 있는 이른바 자유송환 원칙을 세운 반면 공산군측은 모든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는 무조건 고국에 송환돼야 한다고 맞섰다.


    UN군이 포로들을 대상으로 본국 송환 여부에 대한 의사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포로들에게 본국으로의 귀환 포기를 권유했다는 이유로 친공포로들이 본격 저항하기 시작했다. 친공포로들은 폭동을 통해 수용소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를 위해 소위 해방동맹(일명 용광로)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들어 그 본부를 77수용소에 두었다.


    52년 2월 18일 큰 충돌이 있었다. 친공포로들의 저항이 매우 거셌던 62수용소에서 미군은 심사를 거부하는 포로들과 마찰을 빚다 발포해 포로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했으며. 미군측에서는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했다.


    북한은 4월 휴전협정이 진행 중일 때 노동당 부위원장인 박상현을 77포로수용소에 위장 침투시켜 해방동맹의 조직을 인수한 후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을 만들었다. 박상현은 특별결사대와 함께 5월 7일 오후 3시께 76수용소에서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을 납치. 인질극을 벌인 후 5월 10일 풀어주었다.


    이후 새로 부임한 보트너 준장이 강력한 대처와 분산 수용을 진행하자 76수용소에서는 거제도를 폭동화해 적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사제 폭탄과 대창. 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마지막 저항을 했다.
    이에 보트너 준장은 6월 10일 새벽 공수부대 1개 대대를 투입시켜 진압하자 참호속에 숨어 있던 1천500명이 항복했으며. 이 과정에서 포로 43명이 죽고 13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76수용소의 포로 6천500명은 500명씩 타 수용소로 분산됐다. 특히 76수용소와 77수용소 사이에서 터널과 함께 UN군 경비 부대를 점령할 계획을 지시한 지령 문건이 발견돼 진압작전이 늦었더라면 거제도는 피바다가 될 뻔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따라 포로 교환과 함께 UN군은 철수했다.


    거제시는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1996년 사업비 60억원을 들여 1차 개장한데 이어 2002년 11월 137억원을 들여 3만3천615평 규모로 확장했다.
    현재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 산교육장으로 활용되며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정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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