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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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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경남보훈대상 선정

  • 기사입력 : 2007-06-05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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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상식 13일 오후 2시 마산 창신대학서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경남신문사가 제정한 제22회 경남보훈대상 수상자 5명이 결정됐습니다.
    영예의 수상자는 △장한 용사 신재범(62) △장한 유족 이종택(78) △장한 미망인 김숙자(65) △장한 아내 신금순(74) △특별보훈 김영회(79)씨입니다. 

    경남신문사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몰군경과 애국지사 등 국가에 몸바친 용사들과 상이용사. 그리고 이들을 내조한 배우자와 유족들의 자립 의지를 격려하고 돕기 위해 국가보훈처. 경남도와 함께 지난 86년부터 경남보훈대상을 시상해오고 있습니다.
    이번 제22회 시상식은 오는 13일 오후 2시 마산 창신대학 대강당에서 거행되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상금·성품이 수여됩니다.

    ▲심사위원: 위원장=최웅기(경남신문 상무이사). 위원=류대식(마산보훈지청장). 김의행(진주보훈지청장). 박정열(상이군경회 경남도지부장). 장영진(전몰군경유족회 경남도지부장). 배두금(전몰군경미망인회 경남도지부장). 박일웅(경남도 사회복지담당 사무관). 김유성(무공수훈자회 경남도지부 사무국장)
    -경남신문사-

     

    그대들이 있어 6월이 더욱 뜻깊습니다

    장한용사 - 신재범씨(거창군 거창읍)

    월남전 교전 중 부상 제대

    사업 이윤 사회 환원 '모범'

    1965년 보병으로 입대해 신병생활을 하다 이듬해 십자성부대 요원으로 월남에 파병된 신재범(63·거창군 거창읍.사진)씨.

    신씨는 그해 9월11일 월남 나트랑 244고지 전투에서 월맹군과 전투 중 혁혁한 공을 세우다 좌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후송됐으며, 1967년 8월31일 명예제대한 불굴의 용사다.

    이후 상이 3급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귀향한 신씨는 실의에 빠져 1년 동안 칩거생활을 하다 마산에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했다.

    신씨는 친구의 소개로 얼음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평소 성품대로 예의바르고 주어진 일이 아무리 하찮아도 최선을 다해 사장의 신임을 얻게 됐다.

    신씨가 1972년 결혼을 하자 사장은 독립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신씨에게 자금지원은 물론 영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씨는 처음 5평으로 시작한 사업장을 현재 40평 규모로 확장한데 이어 종업원 8명, 트럭 6대를 보유한 업체 사장으로 성공을 거뒀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 태어난 신씨는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가진 것을 자신만을 위해 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등 보훈인의 위상 제고에 이바지하고 있다.
     
    신씨는 2001년 9월 거창군 가조면 도리 대학동에 경로당 건립시 부지 97평(시가 1400만원)을 기증했으며, 최근 매월 무의탁 회원 생일 상 차려주기 및 중식제공 등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장한 유족 - 이종택씨(마산시 산호동)

    장남 잃은 슬픔 이기고

    유공자 예우 조성 앞장
     
    1979년 10월 30일 이종택(76·마산시 산호동.사진)씨는 제502기지 요원으로 복무하던 큰아들 우병(22)씨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아들 이씨는 훈련용 고무보트 적재운반차를 정비하던 중 적재된 고무보트가 전복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유독 정이 많고 착하기만 한 장남 이씨는 항상 아버지의 고생을 마음 아파했고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도 효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아들의 사망소식은 이씨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었고 시련이었다.
     
    허망한 인생을 달랠 길이 없었고 충격과 슬픔에 빠져 이씨는 삶의 희망마저 버리고 실의에 빠져 살았다.
     
    그러던 중 이씨는 우연히 보훈회관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리고 상군, 유족, 미망인 할 것 없이 모든 보훈가족은 다 같은 처지라는 생각으로 친절과 봉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 충혼탑 정화사업 및 주변 가꾸기 등 국가유공자의 예우 풍토 조성을 통해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영원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 오고 있다.
     
    이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회원들의 집을 방문해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드리고 형편이 어려운 회원에게는 직접 사비를 부담해 쌀을 전달하는 등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보훈의 일선에서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전몰군경 유족회 함안군 지회장을 맡고 있는 이씨는 아들을 잃은 아픔을 딛고 매사 긍정적인 자세로 타인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 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장한 미망인 - 김숙자(합천군 가야읍)

    4남매 남기고 남편 순직

    미망인회 활동 솔선수범

    1962년 19세의 나이로 예비군 중대장이었던 남편 박창동씨와 결혼. 슬하에 4남매를 두고 다복하게 생활하던 1974년 남편 박창동씨가 훈련도중 사고로 순직하면서 미망인이 된 김숙자(합천군 가야읍.사진)씨.
     
    3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쉽게 짐작이 가지만, 김씨는 생계를 맡은 가장으로서 4남매에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모신채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며 생활한 덕분으로 4남매를 훌륭히 키워냈다.
     
    김씨의 이같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4남매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착실하게 자라주었고, 지금은 훌륭히 성장해 사회 각층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김씨는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국가유공자들의 미망인을 위해 일해보자는 생각으로 1983년 미망인회 합천군 지회장을 맡아오고 있다.
     
    미망인회 합천군 지회장을 맡으면서 김씨는 지역회원들의 복리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1년 합천군 회원들의 숙원사업이던 충혼탑 건립시에도 회원들과 함께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펼쳐 충혼탑이 조속히 완공될 수 있도록 했으며, 현재 진행중인 합천군 보훈회관 건립 역시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도록 지역의 인사들을 만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 합천군 나라사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충혼탑을 회원들과 정기적으로 찾아 정화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회원들과 함께 지역의 불우시설에 대한 위문활동도 꾸준히 펼쳐 보훈가족에 대한 위상제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장한 아내 - 신금순씨(창원시 반림동)

    6·25때 중상 남편 돌보며

    10명 대식구 이끈 '가장'
     
    10대의 어린 나이로 남편 강문순씨와 결혼해 6·25전쟁 당시 중상을 입은 남편 뒷바라지는 물론 대식구를 이끌며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을 일으키고 누구보다 앞장서 남을 도와 온 신금순(74·창원시 반림동.사진)씨.
     
    신씨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적의 포탄에 양 대퇴부에 중상을 입고 전역한 남편과 시부모, 시누이와 동생 등 10여명의 대가족을 봉양했다.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경작할 땅 한 평도 없어 막노동과 소작일을 하며 소를 몰고 밭을 갈며 힘겨운 농사일을 이겨냈다.
     
    남편 강씨는 양대퇴 파편창 기능장애로 약과 주사에 의존하여 생활했기 때문에 심한 통증이 있을 때에는 대소변까지 받아냈고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남편이 처지를 비관해 3차례에 걸쳐 목숨을 끊으려 할 때도 따뜻한 부부애로 남편을 설득해 새 삶을 살도록 했다.
     
    병든 남편을 대신해 가장으로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자식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켜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워냈으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삶의 터전인 집을 구입하기도 했다.
     
    지난 90년 대한민국전몰군경미망인회 창원시지회와 인연을 맺은 후 국토대청결운동, 충혼탑 정화작업, 거리계도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창원 출신인 신씨는 자신의 삶도 고달픈데도 푼푼이 저축한 연금으로 2004년 반송동에 300만원, 지난해 창원시보훈회관 건립기금으로 102만원, 같은해 12월 장애인회에 100만원을 기탁하는 등 국가유공자 가족으로서 누구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아 왔다.

     

    특별 보훈 - 김영회씨(하동군 하동읍)

    화랑훈장 등 3회 수상

    지역안보의식강화 주력
     
    1927년 하동군 횡천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영회(77·하동군 하동읍.사진)씨.
     
    1945년 하동농고를 졸업한 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육군에 입대해 만 13년간을 군생활을 한 뒤 소령으로 예편한 그는 군 복무기간 중 군인으로서 평생 1번 받기도 힘들다는 '훈장'을 3번이나 연거푸 수상했다.
     
    김씨는 1949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공적으로 금성화랑훈장을 받았으며, 1950년 낙동강 방어전투인 '다부동전투'에서 공을 세운 공적으로 은성화랑, 1951년 평양입성작전인 '장단군 두매리 전투' 전공으로 무성화랑 무공훈장을 각각 수상했다.
     
    1964년 2월말 예편한 그는 이후 고향인 하동에서 문방구와 의류점을 경영하면서 평소 지역사회에 헌신 봉사키 위해 하동군 라이온스 클럽과 재향군인회 회장을 맡는 등 국가 유공자로서의 모범상을 보이기도 했으며 1990년에는 무공수훈자회 하동군지회장의 중책을 맡아 국가유공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 지역 회원들간의 두터운 신망을 얻기도 했다.
     
    김씨는 무공수훈자회 지회장을 맡는 동안 지역안보의식 강화에 역점을 두고 각종 행사시 전문안보 강사를 초청, 안보교육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가 하면 하동군 적량면에 위치한 안보공원 조경 및 정화 사업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특히 그는 2005년 하동군 자체 유공자 장례단을 구성, 나라를 위해 몸바친 노병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전우들의 영예를 높이고 지역 보훈대상자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헌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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