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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7) 독도의 진실과 우리

외로운 섬,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다

  • 기사입력 : 2008-10-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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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바다 해안에서 지평선 너머를 본다면 아마 몇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높은 곳에서는 훨씬 멀리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성인봉은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이다. 성인봉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100㎞가 넘게 떨어져 있는 독도를 훤히 볼 수 있다. 독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이 바로 울릉도이다.

    이런 이유로 독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울릉도 주민이었고,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섬’이었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이 되었고, 울릉도와 함께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울릉도에 딸린 독도. 이것은 곧 울릉도의 주인이 바로 독도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한다. 울릉도는 512년 이사부에 의해 신라의 영토로 포함된다. 따라서 독도 또한 신라의 영토로 포함된다.

    그리고 신라의 뒤를 이어 고려, 조선이 한반도와 울릉도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독도의 국적 또한 자연히 고려, 조선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모든 문제의 씨앗이 생기기 시작한다.

    조선은 치밀한 관료국가였다. 이 관료제의 목적은 백성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이 기본이다. 백성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여야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울릉도는 ‘불안한’ 지역이었다. 언제 폭풍우가 몰아닥쳐 백성들이 휩쓸릴지 모르며, 식량이 없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탓에 이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조선은 ‘공도(空島)정책’이라고 하여 섬을 비우는 정책을 쓰게 된다. 섬 주민들을 육지로 소환하여 육지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울릉도와 독도는 빈 섬이 되었다.

    빈 섬인 울릉도와 독도에는 당연히 일본 어부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일본의 최대 논리인 ‘빈 섬을 우리가 먼저 차지한 것일 뿐’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용복은 친구 박어둔(朴於屯) 등과 함께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는 관리를 칭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재확인하였다.

    당시 안용복은 중인 신분이었고, 친구 박어둔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아주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 결국 나라가 할 일을 힘없는 백성들이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안용복은 함부로 관리를 칭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후 조선의 독도 영유권 재확인과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인정한 사례는 많이 있다. 그리고 구한말에는 고종 황제가 직접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한다는 근대적 칙령을 내려서 영유권 문제에 못을 박았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독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동해 한복판에 있는 독도는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또한 독도 주변 어장은 일본 어민들이 꿈에도 그리던 황금어장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 시마네현은 조례로 독도를 시마네현의 관할로 둔다고 1905년 선언했다. 이것은 몰상식적인 발상인데, 비유하자면 창원시장이 어떤 타국의 섬을 창원시의 관할로 넣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국가의 영토 문제에서는 고작 시 단위의 조례가 아니라, 대한제국처럼 황제의 칙령이 급에 맞는 것이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국’으로 급을 낮춰서 불렀다. 일본은 이제 일본국 본토와 일본의 식민국인 조선국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독도를 ‘조선국’의 관할에 포함시켰다. 당시 일본인들이 만든 대부분의 자료에서 독도는 조선국, 혹은 조선총독부 관할로 되어 있다.

    해방 이후, 연합군은 1946년에 독도를 한국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또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영토는 선언이나 문서로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독도를 드나들었고,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1954년에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고, 경상북도 경찰의 도움을 받아 의용수비대가 경비를 서게 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경찰청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경찰이 경비를 서는 이유는 외교적으로 ‘안정된 한국 영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독도에 군대가 무장을 하고 있으면 외교적으로 ‘분쟁지역 하 한국 영토’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도의 역사에서 일본이 가질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 유리한 자료들이 압도적이며, 제3자가 상식적으로도 판단해도 독도는 우리의 영토이다.

    일본은 이곳을 어떻게 해서라도 분쟁지역으로 국제사회에 인식시키고, 국제사법재판소까지 끌고 가는 것이 목표다. 우리가 일본의 도발에 차분히 대응만 한다면 과거처럼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영유권 문제 말고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독도를 보는 우리의 태도이다.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일본이 도발하면 불같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장기를 태우고, 반일을 외치고, 손가락을 자르면서 극렬하게 항의한다. 그러나 반일을 외치는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사,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 등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이 모순 속에서 ‘독도에 해병대를 두어야 한다’는 외교적으로 위험한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도대체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필자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다른 하나는 영웅주의적 시각이다.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을 장군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업적을 찬란하게 묘사한 것이다. 주로 위인전이나 초등학생 역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들을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잘못하면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적 시각이다. 독도는 지배권력이 신경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의 가난한 민중들이 힘을 모아서 지켜낸 역사라는 것이다. 물론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는 중간 이하 계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나 대한제국, 우리 정부가 이들에게만 맡겨 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름대로 외교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였다. 하나의 생각을 절대화하기 위한 수사법으로 느껴진다.

    이렇듯 독도는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지만 우리들의 많은 생각들이 쌓여 온 곳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도 함께 볼 수 있는 참으로 독특한 소재가 되고 있다.

    임종금(`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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