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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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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1) ‘바람의 작가’ 서양화가 황원철 씨

바람, 그 소리! 눈으로 듣고 그리죠
하늘바람 슬픈바람 돌개바람 바닷바람 용바람 캔버스에서 꿈틀

  • 기사입력 : 2008-10-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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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작가'로 불리는 서양화가 황원철씨가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김승권기자/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작품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들은 고뇌하고 또 고뇌한다. 문학과 음악, 그림 등 장르는 달라도 거기에 투입되는 예술혼의 뜨거움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도내 출신이나 도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명 작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뜨거운 삶이 녹아 있는 작품세계를 듣는 자리를 마련한다.

    서양화가 황원철(69)은 ‘바람의 작가’로 불린다. 구상작품을 그려오던 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을 형상화한 지도 벌써 30년이 지나고 있다.

    “제가 바람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말이에요. 당시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했어요. 평론가들조차 처음에는 바람을 조형언어로 나타내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했을 정도였어요.”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 자택에서 만난 작가는 바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시각화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천사나 용이 실재합니까. 아니죠. 그러나 천사나 용은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바람은 그 형태야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자연물입니다.”

    지난 198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초대 개인전에 즈음하여 미술평론가 이일은 ‘눈은 듣는다’라는 프랑스 시인 폴 크로델(Paul Claudel)의 말을 인용하며 황원철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평론가는 “예민하고 때묻지 않은 눈은 자연의 경관 앞에서 비단 그 외관을 지각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은밀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삭임, 그것은 자연의 생성의 속삭임이다. 황원철 교수의 근작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들려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자연의 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화가는 바람의 움직임을 ‘눈으로 듣고’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 그것을 색채로 시각화·공간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형의 실체인 바람을 화폭에 옮기는 황원철의 작업은 오스트리아 환상파(幻想派) 화가들과의 교분과 그곳에서의 전시회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호응을 얻어 갔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은 유럽의 초현실주의 이후 현존하는 환상파의 보고(寶庫)다. 환상파 거장 루돌프 하우스너가 있는 빈 여행은 나의 회화 세계를 바꾸어 놓는 꿈의 여행이었기에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고 그의 저서 ‘바람의 여로’에서 썼을 정도다.

    황원철이 바람을 가슴에 안은 것은 지난 1977년께부터다.

    마산교육대학 교수였던 그는 학교가 폐교되면서 방황을 겪게 된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찾아간 곳이 문경새재였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청년교사 시절에 도예 연구발표를 했고 또 당시 평면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터여서 그의 문경행은 생뚱맞은 일만은 아니다.

    그는 낯선 땅 문경에서 계곡의 물소리와 새재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밤낮없이 도자기 빚기에 몰두했다. 그는 이곳에서 구워낸 도자기로 마산 동서화랑에서 도자기 작품전을 갖기도 했다.

    도예에 일시적으로 심취했던 이 같은 문경생활은 역설적으로 그의 회화세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여름날 뿌연 안개와 구름이 조령산과 주흘산 허리를 휘감아 돌면서 비바람을 몰아치던 광경이나, 밤새 타오르던 가마의 불꽃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그는 빗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불꽃을 드로잉북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바람과 함께 새재 1~3관문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들에서도 ‘한국적 환상성’을 추출해내면서 환상회화의 새 경지에 몰입하고 있었다.

    ‘바람’의 직접적 작화 동기는 문경새재 도요지에서 나왔지만, 유·소년 시절의 경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는 “고향 뒷동산의 억새풀을 휘젓던 바람, 연을 날릴 때 불던 하늘바람, 동네 뒤 자연동굴인 부엉덤과 아기 시신을 묻어놓은 애장을 스치던 슬픈 바람, 그리고 초등학교 시설 마산 회원동의 앵기밭골에서 불어닥치던 돌개바람, 합포만에 물보라를 일으키던 바닷바람 등도 바람을 그리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됐다”고 했다.

    그는 1979년 불혹(不惑)의 나이에 ‘바람’이라는 이름의 첫 작품을 내놓았고, 오스트리아 빈 초대전을 거쳐 국내에서 바람을 테마로 한 작품전을 잇따라 열면서 ‘바람의 작가’로서 명성을 굳혀 갔다.

    그는 초기의 자연주의적 바람에 머물지 않고, 기하학적 형상이나 여성의 누드를 화폭에 도입하기도 했다. 유원마을 자택 뒤 와룡산이 모티프가 된, 용이 승천하는 듯한 용바람도 그의 캔버스에서 꿈틀거린다.

    또 캔버스와 물감 등 재료에 대한 실험도 이어졌다. 사각의 캔버스를 삼각형으로 잘라 쓰기도 하고, 유성물감에 물을 섞어 균열된 질감을 추구하기도 했다. 이 시기를 그는 초기의 ‘바람 시리즈’와 구분하여 ‘바람의 궤적 시리즈’라 구분한다.

    미술평론가인 박용숙 동덕여대 교수는 황원철의 이 같은 일련의 작업들을 두고 ‘바람의 변주곡’이라 했다.

    그는 ‘바람의 작가’답게 바람이 있는 것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휴전선의 바람이나 알프스와 로키산맥의 바람, 하와이와 남태평양의 바람이 모두 드로잉으로 남았다.

    그의 환상회화 ‘바람’은 ‘유럽의 환상미술이 현대회화에 미치는 영향연구’란 제목의 국비 지원 논문으로 이론적으로 정립됐다.

    “힘이 있어야 좋은 그림이 나옵니다. 지금도 팔씨름으로 저를 이길 청년들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바람의 작가’는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부인(천영희·62)과 새벽마다 수영장을 다니며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자택 2층 작업실에서 어김없이 바람을 그려가고 있는 그는 디지털미디어를 통해 어린이들의 잠재적 창조능력을 일깨우기 위한 프로그램인 ‘황원철 미디어미술교육 아카데미’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서영훈기자 float21@knnews.co.kr

    <작가 약력 >

    △1939년 함안생 △마산상업고등학교, 국립 부산사범대학, 동아대 회화과, 홍익대 대학원 졸업 △부산 덕원중·고교, 사천중, 마산중 교사 △경남미술협회 회장 △마산교육대학 교수 △창원대 초대 예술대학장 △경남도립미술관 제2대 관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제1회 경남미술인상 수상 △제27회 경상남도 문화상 수상 △현 창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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