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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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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4)‘소의 작가’ 최태문

소 그린 지 반백년, 나와 소가 닮아갑니다
어릴 적 소와 함께 울고 웃으며 친해져

  • 기사입력 : 2009-01-0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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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태문 화백이 진주시 상봉동 자택에 있는 작업실인 ‘우촌화실’에서 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최 화백이 자택에 걸려 있는 200호 크기의 ‘장우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촌 최태문


    ‘소의 작가’로 불리는 우촌(牛村) 최태문(68)은 여러모로 소를 닮아 있는 것 같다. 부지런한데다, 순박하고 우직하다. 그는 “키도 작고, 얼굴 생김새도 소 같지 않느냐”며 웃어 보인다.

    우촌이라는 호를 내린 백포(白浦) 곽남배(작고) 화백은 소를 닮은 그의 외모와 성격을 염두에 뒀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진주시 상봉동 비봉산 아래 자리한 그의 집 대문 옆 언덕에는 실물의 절반 크기쯤 돼 보이는 청동 황소상이 서 있다. 후배 작가의 작품이다.

    현관을 열고 살림집이 있는 2층 현관으로 들어서면 100마리의 소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백우도(百牛圖)’, 3층 작업실로 오르는 계단 벽면에는 검은 빛이 도는 누런 털에 떡 벌어진 가슴의 대장소를 그린 200호 크기의 대형 그림인 ‘장우도(將牛圖)’가 걸려 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수백 개의 붓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크기와 쓰임새에 따라 4단으로 나눠져 가지런히 벽면에 걸려 있다. 그가 한국화를 사사했던 백포 선생이 남긴 것들이다.

    그에게 대뜸 왜 소를 그리는지 물어봤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소와 아주 친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가깝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그는 현재의 상봉동 집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다시 지은 집이긴 하지만, 그때 그 자리다. 집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와 함께 가마못으로 불리는 저수지가 있었다. 소싸움의 고장답게 많은 싸움소가 못 둑을 따라 풀을 뜯었다.

    소싸움이 열리면 어김없이 구경을 나갔고, 옆집 싸움소가 우승이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물론 싸움에서 지면, 소와 함께 그도 슬퍼했다.

    그는 “소도 기분이 좋을 때는 이빨을 드러내놓고 하늘을 보며 웃고, 또 슬플 때면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그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던 소를 고등학교에 다니던 17살에 처음으로 스케치북에 옮겼다. 펜으로 그렸던 그림은 그의 작업실에 소중히 보관돼 있다.

    진주농고 시절 그림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그는 한국화의 거장인 내고 박생광(작고)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우촌의 아버지와 고교 선후배 사이였던 내고는 우촌의 상봉동 집에서 한때 그림 작업을 했다. 당시 부친은 그림에 빠져 있던 우촌이 습작했던 스케치북을 내고에게 보여줬고, 내고는 “소질이 있어. 그림 그리는 것을 막지 말고 도와줘”라며 우촌의 손을 들어줬다.

    “선생의 붓놀림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물론 소 그림도 있었고요. 선생께서 서울로 이사가신 후에는 그곳까지 따라가서 배우기도 했어요.”

    그는 그림으로만 사는 전업작가로 나서기 전 금은방을 경영하기도 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세공기술이 좋아 장사도 꽤 잘 됐다. 그러나 금은방에 도둑이 들어 전 재산을 몽땅 잃고 난 뒤에는 “이건 내 일이 아닌 성싶다”는 생각에 더욱 그림에만 매달렸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30대 후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잇따라 입선하며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우촌은 국내는 물론 일본으로 진출하여 활발하게 전시회를 가졌다.

    당시 그가 그린 것은 소 그림만이 아니었다. 더러 풍경화나 정물화가 있었고, 소 이외의 다른 동물을 그린 것도 꽤 많았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소를 그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유난히 소가 그려진 그림이 잘 팔렸어요. 내 자신도 소가 그려진 그림에 마음이 갔고요.”

    그는 야윈 소보다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소를 즐겨 그린다. 작은 키에 통통한 편인 그와 작품 속의 소가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또 한 마리보다는 주로 여러 마리의 소를 화폭에 담는다. 외아들인 그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그였다. 그래서인지 화폭에서 외로움이 묻어나는 것을 꺼려 한다고 했다.

    그가 소를 그리는 데 가장 중점을 두는 부문은 바로 눈과 뿔이다. 소의 눈이 살아 있지 않은 그림은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다고 했다.

    “소는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슬픔에 빠진 소인지 기쁨에 차 있는 소인지는 눈에서 드러납니다. 용맹스런 싸움소나 새끼소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인자한 어미소도 눈이 살아 있어야만 제대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죠.”

    이어 그는 “뿔 또한 소의 암수는 물론이고 그 성질 또한 드러내는 요소”라고 했다.

    고교 시절 역도 경남대표로 전국대회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그 때문에 키는 덜 컸지만, 강한 근력을 갖게 돼 그림 그리는 데는 더 좋은 것 같다”고 했다.

    강한 붓놀림으로 화폭을 채우는 그는 한국화 특유의 ‘여백의 미’를 소 그림에서 구현해 내고 있다. ‘머리와 가슴은 강하게, 허리와 엉덩이는 약하게’ 먹을 입힌다.

    그는 “우직함과 여유로움 등 우리 인간이 소로부터 배울 점이 아주 많다”며 “소의 이런 점이 나를 반백년 가까이 소에 매달리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많은 소 그림 중에서 그가 특히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제1회 경상남도미술전람회(현재의 경남도미술대전)에서 전체 대상 격인 금상을 받은 ‘애(愛)’라고 한다.

    그는 “어느 그림을 가장 아끼느냐는 질문은 어느 자식이 제일 예쁘냐고 묻는 것과 같다”면서도 “어미소가 발 아래 누워 있는 송아지의 털을 혀로 핥는 장면을 담은 그 그림이 왠지 마음에 오래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올해 봄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초대전에 이어, 세종문화회관에서 작품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민들에게 “지금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절망하고 살 수만은 없지 않느냐”며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소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갖고 살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촌 최태문은…

    1941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농고를 졸업했다. 내고 박생광과 백포 곽남배 선생을 사사했으며, 30여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120여회에 이르는 단체전을 가졌다. 제1회 경상남도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했으며, 경남도문화상(1986)과 경남예술인상(1999), 한국예총 문화대상(2000)을 받았다. 경남미술협회장과 개천예술제 대회장, 경남예총 회장,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글=서영훈기자 float21@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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