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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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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백의종군로 (하) 하동·사천·진주지역

1597년 8월 3일 진주에서 백의종군은 끝나고…

  • 기사입력 : 2009-06-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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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충무공이 1597년 7월18일 원균의 패전 소식에 전황을 살피기 위해 노량으로 향하던 중 잠시 쉬어간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 덕천강을 사이에 두고 이 충무공이 군사들을 훈련시킨 진배미와 수곡면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상편에서 이 충무공이 42일간 머문 합천 이어해家와 단계천 변, 동산산성 등을 소개한 데 이어 하편에서는 이 충무공이 도원수 권율의 진지를 찾아 합천으로 가던 중 유숙한 악양 이정란家와 두치 최춘룡家, 굴동 이희만·이홍훈家와 군사적 요충지 정개산성, 지인들을 만나 잠시 쉬었던 강정 등을 찾았다.

    ▲하동·사천

    밤꽃 향기가 코끝에서 진동하는 초여름, 때이른 무더위가 발걸음을 지치게 한다.

    412년 전 백의종군 신분인 이 충무공은 어떤 심정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백의종군 신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이 충무공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밀려오는 왜군에 맞설 방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정유년(1597년) 5월 26일 도원수 권율을 찾아 남원, 구례를 거쳐 하동에 도착한 이 충무공은 비에 흠뻑 젖어 악양 이정란의 집을 찾은 것 같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 충무공이 이정란家에 이르렀으나 집 주인이 문을 닫고 거절해 아들 열(悅)을 시켜 억지로 청해 들어가 잤다고 한다.

    현재 이정란의 집은 찾아볼 수 없으나 당시 상황과 여건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정란家는 악양지역의 중심지인 평사역(平沙驛)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튿날(27일) 아침, 이 충무공은 오후 늦게 출발해 하동 두치 최춘룡의 집에서 하루를 머문다. 하동 두치는 이 충무공이 도원수 권율을 찾아 합천으로 가던 중 들린 곳이며, 또한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받아 임지로 떠나는 도중에 잠시 머문 곳이다. 이곳 역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하동읍 광명리 원전마을과 두곡마을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28일과 29일은 하동 현청에서 머물렀다. 난중일기에는 이 충무공이 ‘늦게 떠나 하동현에 이르니 그 고을의 원이 서로 만나기를 반가이 여기며 성 안 별사를 맞아들여 간곡한 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원(원균)의 미친 짓을 많이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충무공은 이후 산청을 거쳐 도원수 권율의 진이 있는 합천에서 40여일을 보낸 후 7월 18일 원균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권율의 명으로 전황을 살피러 노량으로 향한다.

    20일 오전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江亭)에 도착한 이 충무공은 일대를 둘러본 후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인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하루 머물게 된다.

    21일 일찍 길을 나선 이 충무공이 점심 후 노량(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에 이르니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난중일기에는 이 충무공이 이의득에게 패하던 정황을 묻자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노량의 패전 상황을 들은 이 충무공은 거제의 배 위에서 뜬눈으로 하룻밤을 보낸 후 이튿날(22일) 곤양군 관아에 이르렀지만 몸이 불편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현재 사천시 곤양면사무소 입구에는 사천문화원이 세운 백의종군 행로지 비가 역대 곤양군수 비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곤양군 관아는 지금 곤양면사무소 정문 앞에 있는 비자나무(천연기념물 287호)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비자나무의 수령은 300년이 넘은 것으로 보인다.

    이 충무공은 23일 아침, 노량의 패전 상황 등을 적은 서류를 송대립에게 주어 도원수 권율에게 전달토록 한 후 뒤따라 나서 하동 이희만家에 유숙한다.

    다음 날(24일) 이 충무공은 이희만의 조카의 집인 이홍훈家로 옮겨 3일간 머물게 되는데 이곳에서 적을 토벌할 방략을 구상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폐가로 변한 앞마당 텃밭에는 누군가 심어 놓은 참깨, 고추, 호박 등이 자라고 있을 뿐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러 번 집이 허물어지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한 번도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주

    진주지역은 이 충무공이 7월 27일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家에서 머물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 교지를 받은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며 백의종군 행로의 마지막 지점이다.

    이 충무공은 원계(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家에서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7일 동안 머물렀다.

    이 충무공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 같다. 난중일기에는 ‘7월 29일 냇가에 나가 군사를 점고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 충무공이 군사들을 훈련시킨 진배미(진을 친 곳)는 1974년 ‘이충무공진배미 유지’라는 이름으로 경남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고, 이듬해에는 ‘이충무공군사훈련 유적비’까지 세워졌다. 지금은 딸기 하우스에 둘러싸여 볼품없지만 덕천강을 사이에 두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이 충무공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 온다.

    원계마을 손경례家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는 수령이 족히 600년은 넘어 보인다. 느티나무는 비록 버팀목에 의지해 힘겹게 서 있지만 이 충무공의 모습을 목격한 산 증인일 것이다.

    감나무와 대나무 등으로 둘러싸인 손경례家에 들어서자 이곳이 ‘충무공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사적지’임을 알리는 비가 서 있다. 마루 위 벽에 걸린 빛바랜 이 충무공의 영정과 ‘우계서실’(구한 말 유학자 손창수의 호)은 고택과 어우러져 세월의 멋이 풍겨 난다.

    최정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지금은 손창수씨의 후손들이 농사철이면 이곳에 찾아와 안채에서 머물며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한다.

    8월 3일, 이 충무공은 이곳 손경례家에서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교서와 유서를 받게 되면서 백의종군이 종결된다.

    결국 손경례家는 울돌목의 물살과 지형을 이용해 단 12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왜군의 수군을 물리친 ‘명랑대첩’과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쫓아가 무찌른 ‘노량해전’이 있게 한 시발점이 된 역사의 현장이다.

    글·사진=이준희기자 jh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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