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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10) 최호숙 거제 외도보타니아 대표

팔이 네 번이나 부러질 정도로 30년간 외딴섬 가꾸고 다듬었죠

  • 기사입력 : 2009-08-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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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호숙 외도보타니아 대표가 바다전망대 아래 계단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이 해금강이다.


    최호숙 대표가 비너스 가든, 선인장 동산, 리스 하우스 등 외도의 중심부가 내려다보이는 제2전망대에서 올라 웃고 있다.

    국내외 관광객들이 해상관광지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섬은 단연 거제 ‘외도보타니아’다.

    지난 1995년 4월 15일 개장한 외도보타니아는 2007년 8월 관람객 1000만명을 돌파했으며, 2008년 105만명 등 연평균 8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남해안 파라다이스를 찾고 있다.

    외도보타니아는 전체 면적 15만8400㎡ 중 3만9600㎡가 개발돼 희귀 아열대 식물을 비롯한 크고 작은 식물 740여 종의 식물원으로 구성돼 유람선에서 내리자마자 입구부터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만들기에 30여년을 투자한 외도보타니아 성공 신화의 주인공 최호숙(74) 대표를 만나 삶과 꿈과 섬 이야기를 들어봤다.

    ▲외도와의 첫 인연

    그녀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957년 서울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학창시절부터 서울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녀는 ‘섬’이란 그저 낭만과 사랑이 넘치는 환상적인 곳으로만 여겨 왔다.

    1969년 5월 남편(이창호·2003년 작고)이 느닷없이 섬을 사자고 제안했고, 당시 유명세를 탔던 ‘스콜피오’라는 그리스의 섬이 떠올라서 동의했다고 한다. 그 섬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이 그리스 갑부 오나시스와 결혼식을 올렸던 곳으로, 통 큰 오나시스가 그 섬을 재클린에게 결혼 선물로 주어 또 한번 화제가 됐던 곳이다.

    그때 최씨는 34살, 남편은 36살이었다. 그해 8월 그녀는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을 소집하고 관광버스 한 대를 빌려 통영에 도착, 배를 타고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로 건넌 다음, 비포장길 버스를 타고 밤 10시께 구조라항에 도착, 고깃배를 타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외도에 내렸다.

    다음 날 낮 12시가 다 돼 눈을 떠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상상했던 아름다운 백사장 같은 건 있지도 않았고, 빠삐용이 탈출한 섬보다 더 가파른 절벽만 보여 그 절벽이 자신의 삶인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이 앞바다가 바로 태평양이야”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그 말도 위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부터 다소 마음이 안정돼 오솔길을 따라 능선에 올랐다. 남편은 경치를 감상하라며 망원경을 건넸다.

    가까운 ‘동섬’의 바윗덩어리들은 조각가가 빚어 놓은 웅장한 예술품 같았으며, 멀리 보였던 해금강은 앞마당의 정자같이 느껴지고, 동섬은 이웃하고 있는 옆집처럼 친근감이 느껴져 3년 만에 섬 전체를 다 샀다.

    ▲연이은 개발 실패

    부부는 교사 생활로 열심히 모은 돈으로 동대문 시장에서 직물상을 했던 터라, 외도와 자신들의 삶과 확실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을 이룰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 생각한 것이 감귤농장이다. 신문에서 읽었던 ‘감귤이 남해안에서도 자란다’는 기사만 믿고 결정했다. 부부는 제주도를 찾아가 일주일간 여관에 머물며 감귤나무 심는 법과 농장 운영에 대해 배웠다.

    사실 외도 넓이에는 6년생 500그루가 가장 알맞았지만 3000그루를 샀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던 때라 모든 것을 주먹구구식으로 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반복됐다. 나무를 심는 데 필요한 인부 20명을 갑자기 구할 수가 없어 전라도까지 가서 인력을 구하기도 했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 5~6년이 지나자 감귤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시험 삼아 몇 박스 따 본 감귤은 아주 맛이 좋아 희망이 샘솟았다. 그러나 갑작스런 한파로 수확 직전의 감귤나무가 다 얼어 죽었다. 한파 직전에 땄던 감귤 20박스, 편백나무로 만든 7000그루의 방풍림만 남았다.

    다음에 시작한 것은 돼지 농장. 5~6년을 기다려야 하는 감귤나무와는 달리 1년이면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폐교된 외도분교 운동장에 우리를 짓고 어미 돼지 8마리를 사서 길렀다. 그러나 돼지 파동으로 인해 판로가 막혀 사료 살 돈이 없을 정도로 망했다.

    ▲불가능한 낙원을 만들자

    돼지 농장이 망한 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정원을 꾸며 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틈틈이 책과 잡지 등을 보며 정원에 대해 스크랩을 했고, 식물을 사서 작은 규모로 심어 보곤 했다.

    1970년 동백나무 씨를 심어서 큰 나무가 될 때까지 5년간 기른 뒤, 동백나무 5000그루를 나무 도매상에 팔아 외도에서 첫 수익을 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남해안에도 관광사업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그때 관광농원 사업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간 나무를 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기초를 닦으면서 선착장 공사를 한 것이 외도 역사상 가장 힘든 공사로 기억에 남는다. 물이 가장 많이 빠져나가는 시기인 매달 음력 ‘사리’날에 육지에서 배로 실어나른 재료를 혼합해 시멘트를 쏟아부어야 한다는 시간적 제약과 작업한 다음 날 흔적도 없이 공사한 구조물이 날아가기를 수차례 반복됐다. 그렇게 칠전팔기로 만든 곳이 지금의 선착장이다.

    1976년 12월 거제군으로부터 공원점사용 허가를 받고 본격적인 관광농원 조성에 나섰다.

    외도에 전시할 물건 하나를 사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당시 모든 상품이나 물건들이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어, 조각, 나무, 새로운 집 재료, 작은 장식 등을 제대로 고르려면 14시간씩 걸리는 서울을 갔다와야 했다. 육지에서 구입한 조각상들을 외도로 옮기는 것도 장비가 없어 큰일이었다. 직접 조각상이나 화분을 나르다가 네 번이나 팔이 부러졌다. 말이 좋아서 사장이지 하루 종일 땅을 파고 짐을 나르다 지쳐 쓰러진 날도 헤아릴 수가 없다.

    ▲외도해상농원 개원

    남해안 일대가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해금강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나 해금강에 내릴 수 없게 되자, 하루 관광객과 낚시꾼 500~600명가량이 외도를 다녀가는 수준이 되었으며 1992년 ‘문화시설지구’로 지정됐다. 아무 기약도 없이 섬을 사 모든 것을 쏟아부은 지 20여년 만의 일이다. 서류를 들고 관청을 왔다 갔다 하길 10년째, 드디어 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3년간 집을 설계하고 지었다.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매표소와 안전시설물, 화장실, 기념품점 등의 편의시설까지 모두 마련했다. 마침내 1995년 4월 15일 역사적인 외도해상농원 개원식을 가졌다.

    4월 25일 첫 손님을 받았고, 그렇게 유람선이 한두 척씩 들어오더니, 얼마 안 가 매일 33척의 유람선이 하루 1만명까지 손님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손님들이 섬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돌아보면서 삶의 고달픔도 잊고, 위로받고, 감격하고, 칭찬해줄 줄 알았다. 언감생심, 사람들은 자리 좋은 곳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시고, 뽕짝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춤을 추고 화투를 쳤다. 섬 전체가 난장판이 되었다. 이런 장면을 보자고 그동안 그 고생을 하며 이 섬을 가꾸었던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개원한 지 1년이 지난 후. 도끼로 잔교를 끊어내고 문을 닫을 각오로 유람선 선장들을 불러 놓고 단단히 부탁했다. 외도에 도착하기 전에 금주, 금연 원칙을 꼭 설명해 달라고. 섬 곳곳에 눈에 띄게 금주, 금연 팻말을 붙이고 안내문까지 걸었다. 그렇게 싸워 가며 외도만의 관광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나이 일흔, 나는 아직도 꿈이 고프다

    그녀는 68세가 되던 해 10대 때 품은 꿈 1호인 오픈카 타는 것을 이룰 수 있었다. 운전 기사가 “날씨가 추워서 오픈카를 타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정중히 물었다. “꿈을 이루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얼어 죽더라도 타야지요.”

    젊었을 때 본 ‘애수’, ‘젊은이의 양지’,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의 할리우드 영화에 유난히 정원에서 파티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파티 하는 정원을 꼭 만들고 말리라던 꿈 2호도 이뤘다.

    그녀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꿈들을 수첩에 적어가며 틈틈이 들여다본다. 크고 작은 많은 꿈들이 있지만 그중 열 개만 소개했다. △외도의 풍경 위로 음악이 흐르는 DVD 제작 △선곡한 클래식 음악으로 CD 만들기 △내 삶이 담긴 책 쓰기 △남편과 내가 외도에 쏟은 날들을 기억하는 조촐한 박물관 만들기 △이집트풍 피라미드 정원 만들기 △폐쇄된 중국풍의 정원 만들기 △푸른 바닷가에 흰 건물로 조개박물관 짓기 △정원에 관한 책들을 다루는 ‘가든 북스토어’ 만들기 △세상의 모든 십자가들을 모아 놓은 십자가 박물관 건립 △아름다운 예수님의 정원 만들기다. 이 중 제일 위 네 개의 꿈은 이미 완성했고, 다섯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150년을 산다 해도 다 못 이룰 꿈일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노력할 작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글=이회근기자 leehg@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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