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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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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인생의 오답노트- 김진희(시조시인·교사)

  • 기사입력 : 2009-09-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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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이 문턱에서 살랑살랑 손짓한다.

    백로가 저만치 있으니 밤에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상쾌한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산을 오른다. 어느새 머리가 맑아지고 새 학기를 맞이하여 실천해야 할 것들이 떠오른다. 연초에 세운 계획들이 모두 불발로 그쳤어도 언제나 처음처럼 내일을 맞이해야 할 우리가 아닌가.

    9월부터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웃음 짓기, 소외되고 따돌림 받는 아이가 없는지 살피기, 매일 기도하기, 텃밭에 물 주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먼저 인사하기, 편지 쓰기, 베풂에 익숙하기, 기다림을 즐기기….

    9월에는 무엇보다 인생의 오답노트를 연필로 써 보고 싶다. 인생에서 왕도는 없으며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늘 어수룩하게도 똑같은 실수를 자주 반복한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 순간은 최선의 것이었으리라. 정답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해답지가 있다 하더라도 인생을 정답만으로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살다 보면, 후회하기도 하고 시린 아픔으로 남기도 하고 그것이 시간의 흔적이고 삶의 자취인 듯하다.

    정답이 없는 인생에 오답노트는 어떻게 씌어질까.

    (상략)/아주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감탄하면서 말하리라./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다르게 만들어 놓았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처럼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두 갈래 길에서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여 후회의 그늘에서 살 때도 있다. 이제 내가 선택한 후회나 실수를 오답노트에 적어서 밑줄을 긋고 실수를 되도록 줄여야겠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 후회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기록해 보아야 하겠다.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고 난 뒤 틀린 문제를 오답노트에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처럼 내 인생의 오답노트를 연필로 써 보아야겠다. 보다 더 중요한 곳에는 빨간색을,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하는 곳에는 파란색으로 밑줄을 그어 가며 눈에 띄게 말이다. 알록달록 물들이면서 나와 같이 익어가는 오답노트는 내 삶의 좌표가 되리라.

    지난 겨울, 경주에 있는 동리목월문학관을 관람하였다. 거기에는 많은 장서와 육필원고를 비롯한 문학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 문단의 거목인 두 분의 자료들을 문인들과 함께 찬찬히 둘러보면서 난 한자리에 붙박혀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목월문학의 육필원고가 전시된 ‘습작노트’를 본 순간이었다. 지우고 또 지우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닳은 흔적에서 그분의 고뇌와 번민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 편의 작품을 쓰는데 얼마나 많은 퇴고를 거듭했는지 공책이 해어져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 오래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 중이라는 사무장의 말씀도 있었지만 옆에서 그분이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는 걸 보는 듯했다. 컴퓨터의 정형화된 글씨체에 익숙한 눈이 연필로 쓴 글씨를 보면서 그 사람의 얼굴이 그려지는 듯하였다.

    컴퓨터에서도 딱딱한 폰트에서 벗어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인 손글씨가 서서히 개발되고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가끔은 아날로그식의 수제화가 그립다. 쉽고 간편하고 빠름이 디지털이라면 기다림과 느림의 연속은 아날로그이다. 칼로 연필을 돌려가며 뾰족하게 깎아서 사각사각 써 내려가면 때론 매우 피곤할 것이다. 틀린 문제가 많아서 써야 할 내용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틀린 문제를 또 틀리는 과오를 줄여야 하겠다.

    9월에는 사유의 그늘에서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아날로그식 인생의 오답노트를 써 보고 싶다. 그래서 넉넉하고 풍요로운 이 가을에 내 마음의 밭에도 서정의 잎새가 붉게 물들기를 기대해 본다.

    김진희(시조시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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