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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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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14) 이영춘 (주)장생도라지 대표

“도라지에 미친 아버지, 장남이 모른 체할 수 없었지요”

  • 기사입력 : 2009-09-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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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춘 (주)장생도라지 대표가 아버지인 이성호 장생도라지 연구소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영춘 대표가 진주 금곡면 정자리 장생도라지 사옥 2층 도라지 전시관 앞에서 21년생 도라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함양군 병곡면 월암마을이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꽃들로 가득하다.

    수확을 위해 심어둔 도라지이지만 일반적인 도라지와 차원이 다르다. 대부분 10년 이상 됐지만 수확 시기는 아직 멀었다.

    약용으로 쓰기 위해서는 21년이 돼야 한다. 그때 효능이 최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오래된 도라지의 겉모습은 흡사 큰 나무의 뿌리를 연상시켰다.

    건물 2층 전시관에는 그런 도라지 수십 개가 가로 3m 정도 되는 유리관에 담겨져 있었다.

    3년마다 계속 옮겨 심어야 하기에 각 주기에 따른 도라지도 전시해 놓았다.

    점차 크기가 달라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는 옛말이 지금의 ‘장생도라지’를 탄생시켰다.

    진주 금곡면 정자리 (주)장생도라지 이영춘(52) 대표는 인터뷰 도중 ‘21년 된 도라지’를 힘 있게 들어 올렸다. 그의 미소엔 자존심과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시작은 어려웠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빚더미에서 시작했기에 출발은 마이너스였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죠.”

    이 대표의 아버지인 이성호(78) 원장은 가정보다 도라지 재배에만 관심을 쏟았다. 평균수명이 3년인 도라지가 죽지 않고 오래 자라게 하는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지리산 골짜기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열중했다. 지금도 장생도라지 연구소 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오직 오래된 도라지를 재배하기 위해 아내를 고생시키고 자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도라지 또라이’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이 대표는 신문 배달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악착스럽게 공부해 진주기계공고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77년 울산 삼성중공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0년 뒤 삼성항공(현 삼성테크윈(주)) 수석인사과장에 올랐다.

    아버지 이 원장도 20년 넘게 사는 장생도라지 재배에 성공해 1991년 식물재배법으로는 국내 최초로 발명특허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시 공무원 급여보다 3배나 많았던 이 대표의 월급을 다 가져갔다. 도라지 수명을 20년 이상 연장시키는 데 성공해 영농조합법인 형태로 도라지를 생산, 판매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투자된 엄청난 연구개발비에다 오랜 기간 생산비를 지출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계속 쌓인 빚으로 급기야 단칸방 월셋집을 전전하던 이 대표도 빚 700만원을 떠안았다. 참다 못한 이 대표는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이 대표는 “자본금이 3억5000만원이었던 조합의 총 부채가 28억원에 달했고 월 금융비용만 7000~8000만원이 들어갔다”면서 “그대로 6개월만 지났으면 부도가 났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당시 좋은 직장에 직책까지 포기하는 것은 누가 봐도 납득되지 않았다. 아내와 6개월간 별거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도라지 재배에 성공한 뒤 공장을 확장하다 엄청난 빚을 지셨어요. 장남인 제가 아니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아버지 이 원장은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1954년부터 고향인 진주에서 평균수명 3년인 도라지를 21년까지 키워내겠다는 집념에 평생을 바쳤다.

    14살 때 기관지 천식과 폐질환을 앓던 50대 이웃아저씨가 산에서 큰 도라지를 캐 먹고는 사흘간 잔 뒤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970년에 도라지를 3~4년마다 옳겨 심으면 계속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91년에는 세계 최초로 다년생 도라지 재배로 특허를 땄다.

    오래된 도라지의 재배에 성공했지만 돈을 들여 세운 공장은 기울었다. 회사는 엉망진창이었다.

    부도 직전 회사를 떠맡은 이 대표는 회사에서 몸으로 습득한 경영마인드를 떠올렸다. 사소한 결함 하나까지 점검하는 항공기의 생산공정처럼 치밀하게 살피고 엄격하게 관리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재무분석부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기업은 일어설 수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2000년에는 4억5000만원을 투자, 최신식 생산 자동화 시설을 구축했다. 고객 관리와 생산 기준을 위한 매뉴얼도 직접 개발했다. 고객 명단을 전산화했고 관리의 효율성을 높였다. 또 매출의 20% 이상을 연구 개발에 재투자했다.

    조합도 농업회사로 바꿨고, 국제품질인증도 받았다. 장생도라지의 약효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언론사와 농업기관들을 수십 차례 쫓아다녔다.

    철저한 경영 분석과 공격적 마케팅으로 1년 만에 10억1200만원의 매출액을 올려 경영 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어 1999년에는 20억원, 2000년에는 30억원 등 매년 연간 매출액을 끌어올렸다. 설립자인 부친의 장인 정신에 경영자의 기업마인드가 합쳐진 결과다.

    매출액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과 홍콩 지사에 이어 미국 하와이, 싱가포르, 중국 등 세계 5개국에 8개 영업점을 차례로 확보해 수출에 주력했다. 연간 매출액의 10~15%를 연구 개발에 재투자하고 신제품 개발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원료를 절감하고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장생도라지를 연료로 한 한방차와 약주 등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투자·개발하는 것이 장생도라지의 장수 비결인 셈이다.

    이 대표는 앞으로 장생도라지를 주원료로 한 최적 한방 조성물을 개발해 기능별 약용식품을 상품화할 계획이다. 생명공학 분야의 국제교류와 공동연구를 확대해 화학, 약학, 의학 등 분야에서 도라지의 약용효과를 이용, 제약화에 지속적인 연구를 벌여 인류 의학 역사에 남을 위대한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것이 그의 장기 목표다.

    국내 대기업의 인사과장직을 포기하고 아버지 회사의 경영을 맡아 10년 만에 성공한 농업벤처기업인으로 성장한 이 대표는 대통령 표창을 비롯, 15개의 각종 표창을 받았다. 직원들의 급여도 높은 편이다. 그는 대학 발전기금도 내놓았다.

    이 대표는 “경영자는 연구 개발비와 종업원들의 복지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뒤 남는 것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다른 신화를 쓰려는 그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12년 변화의 결정체 ‘장생도라지’의 건물이 가을 태양에 빛나고 있었다.

    ☞이영춘 대표는= 1977년 삼성중공업에 들어간 뒤 1987년 삼성테크윈 수석인사과장을 지냈다. 공장을 경영하면서 2001년 진주산업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경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학위도 땄다. 2001년 경남벤처농업협회 회장과 농업기반공사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2003년 농촌진흥청 자문위원, 2004년 경상대 누리사업 운영위원, 현재 농림부 정책자문위원과 창원지법 진주지청 범죄예방위원, 진주상공회의소 제20대 상공의원 등을 맡고 있다. 2003년 경남과학기술대상 표창을 시작으로, 농업과학기술상 표창, 지식기반 벤처농업 산업포장과 경남중기 산학기술대전 표창, 진주시 최고경영자상 표창 등을 받았으며 중소기업분야 신지식인에도 선정됐다.

    글=김정민기자 isguy@knnews.co.kr

    사진=전강용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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