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7일 (토)
전체메뉴

사람의 향기 (15) 양해광 창원향토문화보존회장

“내가 모으는 사소한 일상이 소중한 역사라 믿어요”

  • 기사입력 : 2009-09-22 00:00:00
  •   

  •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이 기장·조·수수 등을 심어 놓은 마당에서 허수아비처럼 웃음을 짓고 있다.



    양해광 회장이 1970년대 가정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양해광 회장이 1970년대에 촬영한 버스안내양의 흑백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다.


    추억으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되는 곳.

    간혹 정지된 추억의 시간이기도 하고, 추억의 파편들을 여기저기 모아 온전한 하나의 추억을 만들기도 한다. 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추억의 연속 과정도 담겨 있다.

    애틋한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기도 하고, 가난했고, 그 때문에 절망도 했지만 꿈을 갖고 살았던 시절의 편린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빛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은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하고, 과거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창원시 동읍 주남저수지 전망대 입구 왼편에 있는 ‘그때 그 시절에’ 창원향토자료전시관. 올해 4월 문을 연 이곳은 지역향토자료연구가인 양해광 창원향토문화보존회장이 평생을 두고 찍은 사진과 옛 물건들을 전시해 둔 곳이다.

    주남저수지와 동편저수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원향토자료전시관에서 양해광 회장을 만났다.

    △창원의 변천사가 한자리에

    “지금은 어디에 가도 찾기가 어려운 물건들인데, 하찮은 생각에 다 버렸다면 쓰레기 매립장에 갔겠죠.”

    옛 물건들이라고 해서 딱히 값어치 있는 물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님 누나들의 손때가 묻은 일상적인 물건들이다.

    지난 2007년 말 대산부면장에서 정년퇴임하면서 받은 퇴직금과 주남저수지 앞 논 3마지기를 팔아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 전시 물건들은 모두 창원시에 기부했고, 전시관 내부 인테리어는 경남도와 창원시의 도움을 받았다.

    전시된 자료들은 전쟁이 나던 1950년대를 거쳐 경제를 부흥하자던 60~70년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80년대에 흔히 보던 물건들이다.

    사진 필름이 40만장, LP판 1200장,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초·중등 교과서 250여 권, 자유의 벗, 아리랑 등 대중잡지류가 150권 등이다.

    1950년대 선거 홍보 전단도 있다. 신익희·장면 후보의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승만·이기봉 후보의 “갈아봐야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는 선거 벽보도 있다.

    이때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물건 모으는 습성은 이때부터 생겼는지도 모르겠어요.”

    의식이 있었다기보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딱지를 만들기 위해 수거한 홍보물이란다.

    고3 때의 공납금 영수증 20여 장, 김영삼 전 대통령이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등원할 때 실렸던 1950년대 잡지 ‘인물계’도 갖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기념관에도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어요.”

    1950년대 나온 만병통치약 조고약도 있다. 정확한 상표명은 ‘됴고약’. 1950년대 최초의 화장비누인 ‘흑사탕 비누’, 1960년대 초에 나온 국산 트랜지스터 ‘금성 라디오’는 아직도 소리가 난다. 우리나라 전자제품 수출 1호품이다. 5·16 이후에 국민계몽용으로 보급된 유선방송 스피커도 있다. 발털 ‘부라더 미싱’, 손털 미제 싱가표(SINGER 싱어)는 어머님이 사용하시던 것이다.

    1950년대 세종대왕 우표가 붙어 있는 편지는 아버지 유품이다. 아버지가 직접 필사한 명심보감, 반야심경도 있다. 복사기가 없고 책도 귀했던 시절, 일일이 원본을 빌려 베껴 읽었다.

    1973년 11월 15일 육군 제28사단 전차중대에서 발급한 전역 명령서도 있다. 1960년대 부산시내 전차통학권 12권이 있는데 관람객들이 특이하다고 했다.

    한 달 전쯤 일본 대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다. 1930년대 일본 빅타사에서 제작한 축음기를 보고 학생들이 깜짝 놀랐다. 일본 학생들이 일본 물건을 한국에서 보고 신기해 하는 모습을 보고 묘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반대가 심했던 부인

    그에게는 물건을 버리지 않는 습성이 있다. 많은 갈등을 했다. 이것을 버리게 되면 젊은 세대들은 20~30년 전 보릿고개도 이해 못하게 되는데 물건을 놔두면 실전 교육이 되지 않겠나는 생각 때문에 전시관 건립을 결행했다.

    예상대로 제일 어려웠던 것은 가족들의 반대였다. 특히나 부인의 반대가 심했다.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빌어먹을 짓을 하느냐. 남에게 도움을 받을 처지에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나무랐다.

    한평생 그랬다. 월급 받아 필름만 살 때도 그랬고, 쓰레기통으로 갈 물건들이 온 집안을 다 차지할 때도 그랬다.

    퇴직금과 문전옥답 팔아 전시관을 지으면 당장은 반대하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해해 줄 것이라는 아내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

    △기록사진에 대한 남다른 애정

    사진. 과거의 시간을 정지된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마력 때문에 빠져들었다.

    “왜곡되거나 과장되는 일 없이 사실대로 남긴다는 것 때문에 매력을 느꼈어요. 지금도 포토샵 등으로 사진을 왜곡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는 것이 그의 사명처럼 보인다. 누가 부탁을 한 것도 아니고, 꼭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직업도 아니다.

    사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제대하고 잠시 집에서 놀 때다. 월남 갔다가 돌아온 이웃 형이 야시카 카메라를 가져 왔는데 너무 갖고 싶어 부모 몰래 벼를 팔아 야시카 카메라를 산 것이 계기가 됐다.

    올림푸스, 야시카, 캐논, 니콘 등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는 여러 대의 카메라와 흑백 사진 현상기는 30여 년간 창원의 풍물과 자연, 인물 등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흑백 필름 한 통에 350원이었는데 당시 쌀 다섯 되 값이었다. 공무원 하면서 받은 월급도 필름 사는 데 대부분 다 들어갔다. 어머니가 아내 몰래 필름값을 주기도 했고, 누나들도 호구였다.

    “외국도 가고, 백두산도 가고, 금강산도 사진 찍으러들 가는데 나는 다르다. 삶의 기록들에 매력을 느껴 기록사진을 남긴 것이 잘했다고 생각한다.”

    내 고장의 삶에 대한 기록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는 그의 가방 속에는 지금도 이웃들의 사진이 있다. 이사를 갔거나 해서 만나지 못하다 혹시 만나 사진을 주게 되면 받는 사람들은 너무 기쁘게 생각한다. 그리운 얼굴들을 잊지 않고 볼 수 있는 것도 덤이다.

    40만 장의 사진 중에는 1969년 9월 14일 내렸던 폭우로 주남저수지 둑이 터졌을 때 피난 가는 사람들과 망망대해를 이룬 들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9·14 폭우 때 용강 산사태도 찍었다. 용강리 구룡산 산사태로 마을주민 63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수재 현장을 직접 시찰했다.

    좋은 작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벼 보리 익는 들판을 찍는 것이 좋다. 누구도 담아내지 못하는 추억이라는 덤이 붙어 있는 그의 사진은 바로 예술사진이고 역사사진이다.

    코스모스가 핀 들녘에서 소달구지에 나락을 싣는 모습은 지금 어떤 카메라로도 찍을 수 없다.

    자신이 좋아 찍었지만 이제 창원시민의 자산이 됐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값어치 있는 물건도 아니면서, 별 생각 없이 버릴 법도 하지만 시공을 초월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반세기 전의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창원의 정체성을 찾다

    40만 장의 필름에는 창원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창원이 산업도시가 되면서 사실상 근대사가 실종됐죠. 전통적으로 농업이 번창한 창원이 공업도시로 상전벽해가 됐는데 옛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어요.”

    지금 살고 있는 고장의 옛 사진과 향수에 젖은 물건들을 보면서 시민들의 고장에 대한 정체성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양 회장은 그래서 “향토자료관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창원시나 경남도의 지원금도 없이 운영되고 있다.

    50~60대는 희망을 갖고 고난을 극복했는데 실물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자라는 세대들이 과거의 역사를 알게 된다.

    말로만 어렵게 살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이 살았던 흔적을 보면서 세대 차이도 자연스레 극복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940~50년대 태어난 세대들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살았던 세대들이다. 이런 공간이 있으므로 해서 급변했던 시대를 반추할 수 있게 된다.

    추억이 시작되는 곳. 가을이 깊어지면서 주남으로 찾아드는 철새와 함께 추억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을 맞으려 양 회장은 분주한 준비를 하고 있다.

    글=김용대기자 jiji@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김용대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