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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15)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

고종 황제의 근대화 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 기사입력 : 2009-10-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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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황제


    역사는 오늘을 보는 거울이다. 어제의 모습이 모여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오늘을 보는 거울’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대하거나, 혹은 ‘그때 그 사람이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식의 공상에 머물곤 한다.

    그래서 이번 연재부터는 역사를 통해 오늘의 시사점을 살펴볼까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직면한 모습은 바로 20세기의 격동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지난 20세기를 살펴보면, 오늘의 우리 모습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맞이한 20세기는 매우 불안정하고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개항 이후 국제질서에 편입되면서, 내부적으로는 위정척사 세력과 개화 세력, 민중 세력이 서로 대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강력한 개화정책을 펴기 위한 갑신정변도 있었고, 개화정책을 되물리기 위한 임오군란도 있었고, 동학농민항쟁과 같은 민중들의 거대한 저항도 있었다.

    이것들이 되풀이되면서 조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이 일단 정리된 것이 1894년 갑오개혁이었다. 갑오개혁과 일본의 본격적인 진출은 조선이 일본의 의도대로 나라를 개혁하고, 일본의 대륙전진기지가 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일본을 견제하였고, 일본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서 당시 집권세력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당황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불안을 느낀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였고, 갑오개혁을 이끈 친일개화파 정권을 붕괴시켰다.

    다시금 역사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한반도에는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 틈을 타 고종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 대한제국을 세움으로써 운신의 폭을 마련하였다. 고종 황제가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20세기는 시작되었다.

    일단 키를 잡은 고종 황제는 두 가지 선택을 했다.  

    첫 번째 선택은 서양 문물의 대폭 수용이었다. 특히 전기와 전구, 전화기, 전차, 기차 등등 서양의 문물을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들여왔다.

    당시 전기와 전차는 아시아에서는 일본도 들여오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짓고, 서양 무기를 수입하는 등 고종 황제의 지출은 끝이 없었다.

    고종 황제는 조급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본과 러시아의 대결 국면에서 최대한 빨리 근대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종 황제는 엄청난 비용을 들인 것이다.

    다음으로 고종 황제가 선택한 것은 민권운동의 탄압이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처음에는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민공동회가 의회 설립을 요구하면서부터 고종 황제는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는 철저히 봉건적 전제군주를 꿈꾼 사람이었다. 아마 그는 태종 이방원과 같이 강력한 왕권으로 강력한 개혁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의회 설립이니, 민권운동은 바로 왕권을 내놓으라는 요구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판단이 되자 그는 이들 운동을 탄압하였다.

    고종 황제의 두 가지 선택을 보면, 당시 고종 황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어물쩍거리지 않고 서양식 근대문물을 최대한 많이, 빨리 수입하면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는 단순히 서양 문물을 수입한다고 해서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적인 뒷받침과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근대적인 정치제도와 사회제도를 지향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근대화의 한 축이 이미 허물어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고종 황제는 봉건군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고종 황제의 판단착오를 오늘날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환경 관련 이벤트 하나 열고는 ‘생태도시’를 꿈꾸는가 하면, 로봇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가 갑자기 로봇랜드가 들어서자 ‘첨단 로봇도시’라는 브랜드를 내세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로봇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과 인식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축제장을 유치하고, 대학에 몇몇 학과를 설치한다고 해서 그 도시가 로봇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가, 행사 하나 유치하거나 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화도시’가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정치권은 고종 황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큰 밑그림을 그리고 이를 위한 연구와 지원이 있어야 하며, 시민들의 의식 향상이 함께 이뤄지고, 그와 관련된 행사나 시설이 들어서면서 지역은 그 방향으로 차근차근 발전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하나를 유치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행사가 끝난 행사장은 버려질 것이며, 큰돈을 들여서 만든 시설도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는 그 기능을 잃을 것이다. 돈만 날린 채.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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