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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19) 세종대왕 동상 만든 김영원씨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몸에 밴 농부의 습성이 조각가의 밑천 됐지요”

  • 기사입력 : 2009-10-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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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날인 지난 10월 9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앞.

    훈민정음 반포 563년 만인 이날 세종대왕이 세종로에 다시 살아났다.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이 있던 이날, 지난 5개월 동안 밤낮 없이 동상 제작에 몰두했던 김영원 홍익대 교수(62·조소과)도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창원 대산 출신으로 25명의 동료 조각가와 제자 등과 함께 세종대왕 동상 제작을 끝낸 김 교수를 지난 14일 동상이 설치된 곳에 소재한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불행하고 병치레 많았던 유년기

    김영원 교수는 1947년 창원시 대산면 유등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몸을 다쳐 늘 자리에 누워 있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부산으로 떠나 버렸다. 그때부터 병든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 함께 살았다. 그는 할머니 품에서 자랐고, 아버지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지만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눈만 뜨면 할머니를 따라 들로 일하러 나갔습니다. 채소도 가꾸고 농사도 짓고, 늘 할머니와 함께 일해야 했습니다.”

    김 교수는 어릴 때부터 병약해 자주 아팠다고 한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병치레가 많았어요. 1년 쉬고 1년 다니고 하는 식으로 학교를 빠져 모두 3년밖에 못 다녔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농사를 지으면서 병들어 누워 있는 아버지를 가까이서 수발하기를 바랐어요.”

    ◆고교 1년 때 진종만 선생 미술 교사로 만나

    김 교수는 김해 진영 한얼중학교 졸업 뒤 2년간 농사를 짓다 남들보다 2년 늦게 한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대로 농사꾼이 된다는 것이 억울했어요. 할아버지께 1년만 공부를 시켜 주면 나머지는 장학금을 받아 다니겠다고 약속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어요.”

    그는 할아버지와 약속한 1년이 아닌 1학기 만에 우등생이 되어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한얼고등학교 1학년 때 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도예가인 곡우(谷牛) 진종만 선생을 미술 교사로 운명적으로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미술 시간 때 처음으로 찰흙으로 ‘사람 손’을 만들었는데, 진종만 선생님이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후 각종 학예회에 나가 상을 탔습니다.”

    김 교수에게는 조각가로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고1 때 이미 동아대학교에서 주최한 ‘동아 민전’에 학생부 부문(조소) 1등 특선을 해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미술보다 성적 우등생으로 더 촉망받았다.

    미술 교사였던 진종만 선생도 “김 교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공부를 굉장히 잘했다. 서울대 법대에 가려고 했다”며 그를 매우 우수한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법대 가려다 친구 따라 미대로

    “그림을 잘 그리고 만화도 잘 그려 어릴 적 한때 만화가나 화가가 될까 하는 꿈은 있었지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주위 어른들도 법대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진종만 선생은 ‘너는 눈이 무섭게 생겨서 법조인이 되면 애매한 사람 다치게 할 수 있다. 조각하면 성공하고 밥도 먹을 수 있다’며 미대에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는 고3 때 부산 청산학원 단과반에 등록했다. 당시엔 대학 진학할 사람은 3학년 2학기에 마산이나 부산으로 나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배려해 줬다고 한다. 거기서 미술을 공부하는 친구를 만나게 됐다.

    “아마도 법대 시험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 따라 미술학원에 갔다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홍대 미대에 원서를 내서 합격했습니다.”

    ◆조각가는 농사꾼과 같아

    그는 “조각가는 농사꾼과 같다”고 말했다.

    “조각가도 농부처럼 항상 흙을 만지고 돌을 깎고 나무를 쪼고 합니다. 땀 흘리고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는 것도 농사와 같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눈을 뜨자마자 할머니를 따라 밭일하러 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농부의 습성이 몸에 배었습니다. (저의 불우한 어린 시절은) 인간적인 면에서 불행했지만, 작가로서는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작’ 제작은 오케스트라 공연과 같아

    그는 세종대왕 동상 제작과 관련, “워낙 대작이다 보니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가능했던 작품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가 공연하는 것과 같습니다”고 말했다.

    세종대왕 동상은 김 교수를 포함해 25명이 다섯 달간 작업해 이룬 대작이다. 용좌를 만드는 데만 15명이 작업했다. 이들은 용 62마리와 구름무늬 2000개를 만들었다. 5명은 관련 역사적 자료를 수합했고, 김 교수를 포함한 다른 5명은 직접 동상을 제작했다.

    작품의 덩치가 워낙 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레이저포인터로 지시하면서 작업했다고 한다.

    “사방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은은한 미소를 띠게 하는 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얼굴, 어버이의 인자한 미소를 표현하기 위해 수백 번 얼굴을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그는 작품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어떤 작품이든 30%는 욕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정도 욕은 감수합니다. 세종대왕 동상은 아직 그렇게 대놓고 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세종대왕 동상은

    동상 높이는 6.2m이며, 동상을 받치는 기단의 높이를 포함하면 총 10.4m이며 무게는 20t이다. 세종대왕 동상의 용안은 세종대왕 표준 영정과 현재 통용되고 있는 만원권 지폐의 모습을 참고했다고 한다.

    세종이 54세에 생을 마감한 점을 고려해 40대 후반의 정열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표현했고, 왼손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들고 있어 한글로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만들어 낸 세종대왕의 정신을,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백성을 아우르는 모습을 표현했다.

    세종대왕 동상 건립은 세종대왕동상위원회가 주도했으며, 위원회는 지난 4월 초청작가 5명으로부터 10/1 축소 모형을 제출받아 이 중 김영원 교수의 작품을 선정했다.

    김 교수는 경기도 광주 작업장에서 5개월간 전현직 미대 교수, 제자 등과 함께 동상 제작의 첫 단계인 점토 조각부터 시작해 동상을 제작했다.

    점토 조각 작업에 13t의 점토가 들어갔고 청동은 모두 22t이 사용됐다. 청동 22t은 동전 3200만 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김영원 교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제공한 작가 소개란을 보면 김 교수는 194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1975)과 동대학원(1977)을 졸업하였으며 국내에서 6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아시아 국제미술제(1983, 데카), 올림픽기념 한국현대미술전(1988,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미술-오늘의 상황(1990), 한일 현대조각전(1983-91 서울·후쿠오카)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으며, 동아미술상(1980) 선미술상(1990) 제16회 김세중조각상(2002년) 제7회 문신 미술상 대상( 2008년)을 수상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신천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재직 중이다.

    △작품 소장= 통영야외조각공원, 제주조각공원, 목포조각공원,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신천지미술관, 토탈미술관, 올림픽조각공원, 일산 호수공원, 노브텔 엠버서더 호텔, 인천 캐피탈호텔, 보라매공원 SK사옥, 일산 뉴서울 프라자, 삼성생명 청주사옥, 과천 경마장, 밀리오레, 장충동 3·1 독립기념탑 제작, 국새제작 지명공모 당선,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지명공모 당선

    이상규기자 sk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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