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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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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여행에서 만난 세 나무의 이야기- 이한영(아동극작가)

  • 기사입력 : 2009-10-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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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이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단풍과 억새가 나를 부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을만 되면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마음이 허허로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에 지치고 삶에 부대낄 때 문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철학적인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이럴 때 여행은 의외로 그 해답을 명쾌히 제시할 때가 있다. 마치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가 구도의 길을 떠나 자아의 신화를 찾은 것처럼 말이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고 참된 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아마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목적일 것이다. 꼭 단풍구경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열흘은 일찍 떠난 관계로 이번 남도여행에서 단풍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단풍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세 그루의 나무를 만나 잔잔한 감동과 함께 삶의 교훈을 얻었기에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뿌듯한 충만감으로 가슴이 훈훈하다.

    내장산을 구경하고 백양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수령 700년의 갈참나무는 참으로 당당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갈참나무라는 안내판 속에는 나무 할아버지의 그림까지 그려 놓았다. 그 오랜 세월 수많은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어쩌면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안아 보니 두 아름도 더 되는 둥치는 20여m나 솟아올라 수많은 가지와 잎사귀로 하늘을 뒤덮으며 온 숲의 작은 나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꿈틀꿈틀 용틀임하며 땅속으로 파고든 뿌리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숲은 갈참나무 군락지였는데 주변의 다른 나무들은 그 나무의 기세와 위엄에 눌려 다소곳이 숨죽이고 있었다. 문득 나이 들면 기력과 열정을 잃고 가정과 사회에서 모두 폐물 취급을 당하는 노인들이 생각났다. 젊은 시절 가정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헌신했건만 늙어서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마는 이 땅의 노인들…. 우리 사람들도 저 나무처럼 나이가 들어도,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욱 당당해질 수는 없을까? 인간들이 나무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

    두륜산 대흥사 경내의 1000년 된 느티나무 연리근은 사랑의 숭고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명 사랑나무라는 거대한 두 그루의 나무를 보는 순간, 서로 손을 꼬옥 잡고 정답게 늙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천년을 살아오며 얽히고설킨 뿌리는 엉겨 붙어 이미 한 몸이 되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어느 뿌리가 어디서 어떻게 붙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이 바람 부는 언덕에 나란히 서서 서로 의지하며 둘이 한 몸이 되어 천년을 살아왔구나! 나무 앞에는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기원등이 수백 개 놓여 있고, 그 속에 연인들의 소망을 담은 촛불들이 타고 있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말고 이 연리근처럼 서로 사랑하며 백년해로하기를 빌어본다. 조금의 어려움도 참지 못하고 걸핏하면 이혼하고 마는 요즘 사람들이 꼭 한번 와서 볼 일이다.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인 녹우당 앞에서 본 300년 된 소나무 또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수령으로 봐서 선생께서 손수 심지는 않았을까? 몇 아람이나 되는 거대한 둥치를 늘씬하게 뽑아 올려 푸른 하늘에 청청한 머리를 올려놓은 모습이 참으로 늠름했다. 깊이 패어 갈라진 거북 등껍질은 그냥 나무껍질이 아니라 모진 비바람을 맨몸으로 당당히 견뎌내고 얻은 자랑스런 훈장이었던 것이다.

    너무도 멋있어서 둥치를 끌어안고 손바닥으로 쓸자 그 껍질에서 은은한 솔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것은 시련을 견뎌 자신을 이겨낸 자에게서만 뿜어져 나올 수 있는 내면의 향기였다.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구천의 뿌리 곧은 줄을 글로 하여 아노라.’ 윤선도의 오우가 중 솔의 노래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굳센 의지의 소나무 앞에 서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한영(아동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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