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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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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겨울 풍경- 김미숙(시인)

  • 기사입력 : 2009-11-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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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의 첫추위가 강한 바람을 몰고와 거리를 휩쓸어가던 날 저녁 무렵,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차창엔 마른 낙엽이 사납게 부딪히고 붉은 태양은 도심의 빌딩 스카이라인 너머에 걸려 있었다.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 중인 동안 내 눈에 띈 두 사람에게 나는 강하게 시선이 끌렸다.

    갓 예순을 넘겼음 직한 초로의 부부로 보이는 그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바람은 두 사람의 옷깃을 파헤치는데 온기를 나누려는 듯 손을 맞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강하게 부정하는 어떤 심리적 반발감 같은 것이 내 의식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뭘까…. 신호가 바뀌고 차를 출발시키면서야 알았다. 그 다정한 풍경이 분명 아름답지만 그러나 초라하다는 것. 그런데 그 생각에 대한 또 다른 반발감이 튀어 오른다. 왜 나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초라하다는 생각까지 갔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물질 만능주의에 길들여진 나의 시각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와서 나는 그 풍경과 풍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녹아 있는 정서적 괴리감을 자책하면서 시로 옮겼다.

    ‘찬바람 부는 버스정류장/초로의 부부 /손잡고 다정히 앉아 있다// 하늘 반쯤 가린 빌딩 너머/햇살은 한해처럼 가라앉고// 부부의 흰머리 까치놀로 타는데/ 따스하고 아름다운/ 그 모습 흑백사진으로/ 와 박힌다 // 태양이 뚝 떨어지면’<겨울 풍경 designtimesp=6362> 전문

    자본주의는 문명을 극대화하여 인간을 편리하게 하지만 그러나 지구촌의 생산물을 한쪽으로 치중하여 소수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즐기지만 어떤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얻지 못해 힘든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리고 누리는 자는 누리지 못하는 자를 은근히 내려다보는 습성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최악의 경제시스템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다른 시스템보다는 낫다”는 말처럼 현대사회를 유지하는데 아직까지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시스템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했고 사회주의는 수정을 거듭하며 ‘제3의 물결’론 쪽으로 아직은 실험 중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그런 거대 경제담론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에 비쳐진 내 모습의 이중성이 과연 나만의 것이겠느냐 하는 물음 하나를 던져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물질의 봄을 가져왔다지만 영혼의 겨울도 함께 가져오지 않았느냐 하는 의심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노부부의 모습을 초라하게 느낀 것은 당신뿐이지 우리는 그렇지 않다”라고 당당히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11월의 첫추위는 겨울을 알리는 신호이겠지만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에는 그렇게 겨울이 지속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 노부부는 추운 거리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지만 손을 맞잡고 함께 동행해왔고 또 동행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그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찬바람에 목을 움츠린 그들 부부는 비록 몸은 추워도 마음은 더없이 따뜻한 봄이었을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따뜻한 차 안에 앉아있었지만 내 마음은 한겨울 나목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 분명하다. 순수한 풍경에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덧칠한 잘못을 탓한다면 반성하고 또 반성하겠다. 그런데 과연 나만 반성해야 하는 것일까.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데 나는 벌써 봄을 기다린다.

    김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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