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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돼갑니까] 진해 웅천읍성 복원사업

성벽 복원 등 내년 6월 1단계 준공
동문루·해자 복원, 주차장·안내센터 설치 등 1단계 공정률 60%

  • 기사입력 : 2009-12-07 09: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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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 웅천읍성 복원사업은 주변의 웅천도요지, 제포진성, 안골왜성과 함께 진해시의 대표적 유적지로 지역의 역사·문화적 뿌리를 알리고 교육할 수 있는 공간 조성의 필요성에 따라 추진됐다.

    특히 신항만 조성과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개발에 따라 진해 동부지역의 도시화가 급격히 이뤄지면서 웅천읍성의 보전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는 지역의 요구도 크게 작용했다.

    웅천읍성 복원공사를 주관하고 있는 김오영 진해시 해양레저산업담당관은 “이 사업은 시 동부지역의 대표적 역사문화관광자원 개발을 통한 시의 일체성 및 역사의식 고취를 위해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업 개요= 웅천읍성 보수·정비계획에 따라 지난 2001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가 조사단을 구성해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웅천읍성은 평지성으로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성과 성문은 일제강점기 이후 거의 철거되고 동문지의 일부만 남아 있다.

    체성(體城)은 동벽과 남벽, 서벽 일부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었지만, 내벽부(內壁部)는 민가와 학교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외벽에 비해 훼손 정도가 훨씬 심각했다.

    경남발전연구원 측은 당시 웅천읍성 동벽 쪽 문지와 옹성, 성외 시설인 해지와 석축, 해자 밖의 석축시설과 구하천, 해자 안의 방어시설인 목주 등은 다른 읍성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복원이 완료되면 큰 볼거리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추진 상황= 2004년 시굴조사를 맡았던 경남발전연구원이 복원 기본계획을 수립했고,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업 승인을 받았다.

    이후 2006년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얻어 지난 2008년 5월부터 공사를 개시했다. 공사에는 남해안관광벨트사업의 일환으로 도비와 지방비가 각각 64억여원씩 모두 129억여원이 투입됐다.

    1단계 공사는 동남 측 567m 구간 성벽 복원과 동문루·해자 복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와 함께 주차장과 안내센터도 설치될 예정으로 현 공정률은 60% 정도이다.

    오는 2010년 6월 준공 예정으로 공사가 마무리되면 역사적 자료로써 충분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향후 계획= 웅천읍성 복원공사의 최종 목적은 해양공원 등과 연계된 관광벨트화로 지역관광의 활성화에 있다.

    따라서 2단계 공사로 역사문화의 체험과 교육이 가능한 유적공원을 조성하고, 마지막으로 읍성 내부와 나머지 성곽 복원을 마무리해 옛 모습을 되찾게 된다.

    2단계 공사는 오는 2016년 준공 계획 아래 진입광장과 전통정원 등이 들어서고, 서측 323m 구간 성벽 복원공사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이어 3단계로 관아, 민가, 전시관, 놀이마당 등 내부 공사와 북측 188m 구간 성벽과 남·북문루 복원을 2020년까지 마무리 할 계획이다.

    시는 2단계와 3단계 사업이 각각 157억원과 776억원 등 총 933억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남해안 관광벨트사업이 올해 만료됨에 따라 2·3단계 사업을 위해서는 국고 지원이 필수적이다.

    시는 예산확보 방안의 일환으로 웅천읍성을 사적(국가지정문화재)으로 지정할 것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이문재기자

    mjlee@knnews.co.kr

    ☞웅천읍성은= 경남도 지정기념물 제15호로 진해시 성내·남문·서중동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태종 7년(1407년) 내이포 개항에 따른 왜관(倭館)의 설치로 거주 일본인들이 증가하자, 이들로부터 읍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

    중종 5년(1510년)에는 삼포왜란으로 일시 함락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기도 했다.

    조선후기 기록에는 19세기 말까지 건재했지만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읍성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 규모는 전체 길이가 946m, 높이 약 4.5m로 내부에는 동헌과 객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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