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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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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15) 시인 정일근

“詩와 하나돼 나와 세상만사 모든 이야기 담아”

  • 기사입력 : 2010-03-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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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일근 시인이 모교인 마산 용마고(옛 마산상고)를 찾아 김주열 열사의 흉상을 만져보고 있다.

    마산아 삼월아 주열아/ 우리가 오늘 서로 만나/ 질긴 사랑의 뿌리를 내리며/ 서로가 서로에게 엉키어 뜨거운 힘을 나누며/ 살과 뼈를 태우는 고통으로 만나고 싶구나/ 오라, 마산의 봄이여 내 사랑이여/ 불타는 한몸으로 만나고 싶구나(정일근 ‘마산의 봄’ 중)

    지난 15일은 마침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3·15의거가 일어난 지 50년이 되는 날이었다. 마산 산호동 용마고(옛 마산상고) 앞 김주열 열사 동상을 마주보고 서 있는 한 사람, 오랜만에 모교를 찾아 보고 싶다던 정일근 시인이었다.

    정 시인은 매년 3·15 때면 3·15 민주묘지를 찾는다. 그는 “詩의 몸은 진해에서 만들어졌지만, 詩의 정신을 만든 것은 마산입니다”고 마산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슬픔이 시를 쓰게 하다

    바다는 푸른 접시에 담겨/ 신의 아침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신은 아페리티프를 주문해 놓고/ 노래하듯 시를 읽거나/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듣는다(‘사월, 진해만’ 중)

    정일근 시인은 벚꽃과 바다가 아름다운 진해시 탑산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7살에 다시 진해로 돌아오기 전까지 양산 친가에서 자랐다. 친가가 있던 마을은 자연이 유난히 아름다웠고 그는 산과 들을 뛰어 다니며 많은 것을 체험했다. 풍만하고 포근한 자연 안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은 그가 한국 대표 서정시인으로 자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시련은 소나기처럼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30대 젊은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 벅찬 슬픔이었다. 슬픔을 떨쳐버릴 길이 없어 시에 호소했다. 그의 첫 시였다. 초등학교 5년 때다. 어머니는 셋방이 딸린 작은 아구찜 식당을 구해 생활을 이어갔다. 그때의 기억을 그는 ‘아구’라는 시에 기록해 두었다. 가난으로부터 눈물을 배웠고, 말수가 줄었다. 대신 암기력이 생겼다. 시를 닥치는 대로 외우기 시작했다.

    “교과서며 각종 책에 있는 시를 몽땅 외워 버렸어요. 선생님이 문예반에 추천했는데 처음 나간 백일장에서 장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백일장의 신, 그리고 등단

    백일장 장원은 삶에 찌들어 있던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를 퍼지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미소는 그로 하여금 시인의 길을 잡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처음 본 것 같아요. 그때 어떻게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상을 받아오는 아들이 기특했던 어머니는 큰마음을 먹고 안데르센 동화집을 사주셨다. 12개월 할부였다. 컬러판 동화집은 초등생 정일근에게 빛나 보일 정도로 황홀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정 시인은 동화책을 만질 때면 꼭 손을 씻을 정도로 동화책을 아끼면서 읽고 또 읽었고 이후 모든 종류의 책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참가하는 백일장마다 수상하며 전국 백일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초등 5학년 때부터 대학까지 그의 백일장 수상 퍼레이드는 계속됐고 시제로 어떤 게 나올지 알아맞힐 정도로 백일장에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대학 진학 때까지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선택의 여지 없이 교사의 길을 택했고 국어교육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수상한 시절 탓에 졸업을 눈앞에 두고 거제 학동으로 도망해야 했다. 그때 ‘유배지’라는 책을 들고 갔다. 숨어 지내면서 읽는 ‘유배지’ 이야기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같이 다가왔다.

    어느 날 후배로부터 온 편지 속에 오려낸 한국일보 신춘문예 사고가 들어 있었다. 유배자와 다름없던 자신의 이야기,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를 응모했다. 결과는 당선. 경남대 재학 중 신춘문예 등단 1호자가 됐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일은 술술 풀렸다. 졸업 후 85년 3월 모교인 진해남중으로 발령도 받았다. 88년에는 신문사 기자로 변신하기도 했었다.

    특별한 40대, 진정으로 ‘詩人’이 되다

    한 줄 잘 빚어 놓고/ 마침표를 찍을 것인지/ 마침표를 지워 버릴 것인지/ 오래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시가 문장부호 하나에/ 무거워할 때가 있다/ 시가 문장부호 하나에/ 가벼워질 때가 있다/ 그걸 아는 이가 시인이다(‘시인’ 전문)

    “시인이 뭔지 압니까?” 정 시인이 불현듯 물었다. ‘시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무슨 속뜻이 있을까 싶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살짝 웃었더니, 그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와 한몸이 된 사람입니다”고 답했다.

    불혹이 되던 1998년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해였다. 뇌종양 진단을 받고 2번의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병든 그에게 세상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를 받아 준 것도 시요, 그가 주먹 속에 쥐고 있던 것도 시였다.

    그가 시와 한몸이 되리라 마음먹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3년간의 회복기를 거쳐 2001년 새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를 발표했다. 그해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 수록됐다. 그는 “입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라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시집 중 하나”라고 웃으며 얘기했다.

    은현리, 오래된 미래와 만나다

    정일근 시인에게 전화가 오면 휴대폰 액정에 ‘은현리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예쁜 이름, ‘은현’은 ‘은빛 언덕’이란 뜻이다.

    이제 신은 자연에만 자신의 말씀 남긴다/ 사람이 만든 도시에 나가 설교하지 않으며/ 자신이 만든 시골에 남아 전원생활을 즐긴다/…/나는 이제 막 글을 배운 초등학교 1학년처럼/ 연필 끝에 침을 발라 열심히 받아 쓰고 있다/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에 남기는 신의 말씀을(‘자연 받아쓰기’ 중)

    그는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주민이다. 헬레나 노르베리가 쓴 책 중에 ‘오래된 미래-라다크에서 배운다’라는 책이 있다. 그는 은현리에서 ‘오래된 미래’를 만났다고 했다.

    뒷산 격인 솥발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양산의 할아버지 마을과 이어진단다. 그는 지금 그 옛날 ‘저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하고 상상했던 그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의 서정성을 폭발시켰다는 ‘은현리’는 삶의 터전이자 문학 교재다.

    병마를 물리쳤지만 고비는 다시 찾아왔다.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섰다가 고산병에 걸려 고생을 했고, 공정무역 홍보대사가 되면서 동티모르에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생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길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시였다. “나는 시인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좌절합니다. 의술이나 약이 아니라 시가 나를 일으켜 세웠죠.”

    세상만사, 다 시에 있다

    돌아오는 3월 말께 그가 시력 25년을 정리하며 냈던 10번째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를 발표한 지 1년이 된다. 다음 시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는지 물었다. “시는 늘 쓰는 것이지만, 묶어서 시집을 내는 것은 당분간 쉬려고 한다. 좀 더 압축시키고 운율을 살리는 퇴고 과정을 가지려고 한다.” 그렇다. 시집이야 언제든 원하면 낼 수 있다. 올해까지 그가 쓴 시편만 약 1000편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 안에 온갖 세상 이야기를 담고 담았다.

    “그동안 썼던 시들을 돌아보니 세상만사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 쓴 것 같아요. 70세까지 1000편은 더 쓸 수 있겠죠? 그때가 되면 2000편을 모아 전집을 낼 거예요. 나란 사람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고 세상과 어떤 교감을 나눴는지를 알 수 있는 보고서 같은 전집을 남기고 싶어요.”

    자서전 대신 시 전집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당신, 시로 구원받고, 시와 한몸이 되었다는 당신은 정말 詩人이군요.

    ☞ 정일근 시인은= 1958년 진해 출생, 도천초교, 진해남중, 마산상고, 경남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84년 실천문학사 신인상 등단(야학일기), 85년 한국일보(시), 86년 서울신문(시조) 당선, 한국시조작품상·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소월시문학상·영랑시문학상·지훈상 등 수상.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4), 처용의 도시(1995), 경주남산(1998),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2003),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발표(2006), 오른손잡이의 슬픔(2005),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2009) 등 발표.

    글=김희진기자 likesky7@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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