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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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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돼갑니까] 진해 주기철 목사 기념관 건립사업

중간 설계 용역 토대 연내 착공 2011년 완공 계획
독립운동관·영상실·기독교 순교관·생가 미니어처·외부 휴게 데크 등 설치

  • 기사입력 : 2010-05-03 0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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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시 북부동에 건립될 ‘주기철 목사 기념관’은 ‘항일독립 운동 산 교육장’과 ‘한국 기독교 성지 순례지’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은 지난 2001년 주기철 목사의 고향인 진해 웅천 한 교회에서 처음으로 거론됐고, 같은 해 11월 ‘주기철생가 복원운동본부’(이하 복원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본격화됐다.

    당초 복원운동본부는 주 목사의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진해시는 주 목사가 독립운동가라는데 착안해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으로 사업을 확대하게 됐다.

    사업은 지난 3월 설계 용역 중간보고회 내용을 토대로 연내에 착공해 오는 2011년 완공할 계획이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 조감도

    ◆어떻게 건립되나= 기념관은 진해시 웅천 북부동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연면적 1014.90㎡)로 건립된다.

    지상 1층은 독립운동을 테마로 주기철 목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배울 수 있는 독립운동관, 세미나 등을 할 수 있는 영상실 등이 설치된다.

    독립운동관에는 △일제 강점기 하에서의 한국 교회 △순교의 쟁점인 신사참배에 대한 이해 △주 목사의 어린 시절 등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된다.

    지상 2층은 기독교 순교를 테마로한 교회 목사로서의 삶을 조명한 기독교 순교관, 생가 미니어처 전시 및 3.1운동 등에 대한 기획 전시관, 외부 휴게 데크 등이 설치된다.

    전시는 직접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이미지를 비주얼적으로 구성하고 실물과 유물 전시, 영상 편집을 통해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 창출에 초점을 뒀다.

    진해시는 기념관이 준공되면 인근 웅천읍성, 웅천도요지, 이순신 장군의 해전 격전지인 안골포, 합포 해전지 등과 연계해 지역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한국 기독교의 성지(聖地)로서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추진상황= 지난 2001년 웅천교회가 주축이 돼 주기철 목사 생가 복원운동본부가 조직됐다.

    복원운동본부는 이후 진해시에 건립지원을 요청했고, 2003년 9월 주기철 목사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위해 총사업비(당초 예산 28억원)중 10억원을 후원하는 내용으로 진해시와 협약을 체결했다.

    2003년 12월 기본계획 용역이 완료됐고, 2006년 4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심의회의 승인을 받아 국비 지원이 결정됐다.

    복원운동본부는 2007년 7월 사업을 보다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대한예수교장로회경남노회에 사업을 위임했고, 경남노회와 진해시가 다시 협약을 체결했다.

    경남노회는 2008년 8월 북부동 일원 부지 2867㎡를 진해시에 기부채납 했다. 주 목사의 생가는 인근 백일마을이지만 그린벨트로 개발이 묶여 있어 사업지를 북부동으로 선정했다.

    사업비는 2009년까지 국가보훈처 분권교부세 4억5000만원을 지원받고 시비 10억5000만원을 확보했다.

    ◆향후 과제= 시는 우선 확보된 15억원의 예산으로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부족한 사업비는 추가로 확보해 2011년께 기념관을 준공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진해시는 지난 4월 최종 용역결과 12억원의 예산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판단, 정부와 경남노회측에 추가 지원을 요청해 놓은 상태다.

    경남노회측은 준공 이후 인근 부지를 매입, 조경과 관련 기념물 등을 추가로 설치해 기념관을 확장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념관 운영주체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준공 뒤 시 측과 경남노회가 논의해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이문재기자 mjlee@knnews.co.kr

    ☞ 주기철 목사는?

    1897년 진해에서 출생해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돼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 교회 집사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웅천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듬해 12월에는 웅천청년운동단(熊川靑年運動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 창립총회에 참석해 의사(議事)로 선출됐다.

    1936년 장로교의 본산으로 불리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전통 깊은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 위기에 처해 있었다.

    또 총독부에서는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수립, 경찰력을 동원해 학교와 학생들에게뿐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갖은 탄압을 벌였다.

    1938년 9월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해 전국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정면으로 대항해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조선 민족의 애국심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악정을 규탄하자”고 호소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가석방된 후에도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설교를 계속했으며, 1940년 7월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또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1963년 12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며, 2007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이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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