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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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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세상에…’- 최은애(시인)

  • 기사입력 : 2010-08-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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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청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누구에게나 ‘저희 집에 오세요’라고 노래 삼아 인사하곤 했다.

    오랜 아파트 생활을 접고 시작한 단독주택 살림살이는 마음 맞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데 적합했으므로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자 초대받은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심지어 나의 건강상태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과한 일정 속에서도 ‘사람들이 찾아드는 집이 좋은 집’이라는 남편의 주장을 반드시 믿어주자 싶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중심으로 친척에서부터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사회생활에 엮여 있는 사람들까지 거의 전국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하루 이틀씩 묵고 떠나는 사람들과 유례없는 더위 속에서 땀을 흘렸다.

    하지만 휴식을 즐기고 떠난 그들로부터 나는 더 소중한 에너지를 얻어가지곤 한다.

    올여름 손님 중 최고 중의 최고는 세 살배기 사내 아기 민제였다.

    일행들에게 둘러싸여 우리 집 앞에 나타난 아이 때문에 주변이 온통 환해진 그런 기분 좋은 느낌이 떠나는 날까지 한결같았다.

    한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서울 변두리 연립주택에서 할머니와 혼자된 큰아버지와 함께 비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민제는 늘 웃는 얼굴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속에 고달픈 어른들의 그늘을 몽땅 가리고도 남을 낙천적인 성정과 명랑함은 아예 엄마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세상에 나온 것 같았다.

    처음 방문한 집에 대한 예의와 상냥함으로 조심스럽게 아래위층을 오르내리고 마당에선 물놀이에 집중하곤 했다. 뭐든 음식을 가리지도 않고 잘 먹어 주고 잠투정 한 번 없이 쉽게 잠들고 순하게 깨어났다. 지독한 더위 속에서 어른들 위주로 짜여진 관광 일정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잘 따라주었다.

    또래에 비해 사려 깊고 침착한 이 아이는 그에 비해 말이 많이 늦는 편이다. 아버지는 워낙 말이 없는 성격이고 어머니는 아직 우리말이 서툰 데다가 할머니는 함경도가 고향이라 이북 사투리 억양이 그대로 남아 있으시다.

    그래서 아이가 구사하는 몇 마디 말들은 독특한 억양을 담고 있었는데 나는 그 부분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 사이 아이의 큰아버지 등에 상처가 나게 되었고 그걸 보게 된 아이가 예의 그 독특한 억양으로 ‘세상에…’라고 걱정 어린 말을 한숨처럼 내뱉자 주변에 모여 있던 어른들은 너나 없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아마도 할머니에게서 배웠을 그 한마디 속에는 아이의 깊은 속내와, 아이의 특별한 환경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이북 사투리의 억양과 중국말의 뉘앙스를 섞어 놓은 정말이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였다.

    세계화 속에서 또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으로 다문화 가정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이들을 만나게 된다.

    이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는 즈음이라 이 아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2박 3일의 짧고 아쉬운 휴가 일정을 끝내고 아이가 돌아가게 되었을 때 민제는 헤어짐의 섭섭함에 울먹거렸고 우리 부부도 그만 마음이 먹먹해져 버렸다.

    어쨌든 가까운 시간에 다시 만나리라는 약속을 하고 아이를 보내고 나니 집안이 다 텅 빈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라는 말은 그대로 남아 공기처럼 집안을 떠돌아다녔다.

    최은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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