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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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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도내 노조간부 32명 서훈 신청

경남노조 설립 항일투쟁 선봉 하동출신 김계영 3형제 등
하동 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 국가기록원 자료 밝혀

  • 기사입력 : 2011-02-25 09: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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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노조위원장 독립투사 김계영 삼형제가 태어난 하동군 하동읍 두곡리 마을 전경.

    하동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45·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소장은 1930년대 경남·부산·울산 일대에서 교직원 및 노동자 농민들을 규합해 노조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른 경남지역 3개 노조간부 32명의 항일기록을 국가기록원에서 지난 1월 찾아 24일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했다.

    서훈을 추진되는 노조간부는 조선 재건설동맹 10명과 경남 산업노동조합 협의회 9명, 경남 교육노동조합 협의회 13명 등 모두 32명이다.

    특히 이들 중에서 하동출신 김계영, 태영, 두영(하동군 하동읍 두곡리 660) 3형제는 3개 노조 설립에 앞장서고 경남지역과 중앙부 노조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넘나들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것으로 밝혀졌다.

    24일 정 소장이 밝힌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조선총독부 재판기록과 언론보도에 의하면 조선재건동맹 경남집행위원장 김계영(金桂榮·1902~1950)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두 차례 투옥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6년 시대일보 기자로 근무했으며 1928년 ‘하동청년’이란 잡지를 발간, 주필로 활약하며 조선독립과 민족의식 고취를 담은 내용의 글을 실었다. 이로 인해 1928년 5월 일본경찰로부터 출판법 및 보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부산 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김계영을 비롯한 10명에 관한 재판기록. (1933년 4월20일 판결)

    독립운동을 주도한 경남 노조간부들의 공적조서.

    출소 후 그는 1931년 2월 고경흠, 권대형 등과 경남지역 조선 재건설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동지 14명과 함께 또다시 검거돼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1933년 진주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계영의 바로 아래 동생 김태영(金台榮·1907~1974)은 정치용, 이태영 등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한 경남산업노동조합 협의회를 결성하여 경남위원장을 맡아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1937년 일본경찰에 동지 11명과 함께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구속자 중 최고 형량인 징역 3년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그와 함께 활동한 정치용(鄭致鎔·하동군 양보면 장암리)은 이 사건으로 징역 10월을 살았으며 이태영(李台榮·하동읍 읍내리)은 징역 1년 2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두영(金斗榮·1910~1950)은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33년 3월 부산에서 비밀 결사조직인 경남교육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3월 28일 그는 마산 앞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선중(船中)에서 회합하여 결사의 강령 및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김두영이 중앙부 책임 및 재정부원을 맡았다. 그러나 교육노동조합 협의회가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1933년 10월 4일 관련자 33명이 체포되면서 22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해체됐다. 그는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위반으로 구속자 중 최고 형량인 징역 4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윤관기자 kimy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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