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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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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25) 94세 재미화가 김보현 화백

순간순간 느낀 대로 자유를 그린다

  • 기사입력 : 2011-06-1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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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활동하는 어느 노화백이 어머니가 그리워 고향 창녕을 찾았다.

    94세의 노화백은 지팡이를 짚고 창녕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머니의 체취를 찾아나섰다. 노구를 이끈 여정에도 어머니와의 기억을 더듬는 내내 유년시절로 돌아간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머니의 흔적도 흔적이지만 자신이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라 아련한 사춘기의 향수도 떠올랐다. 그래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미국의 미술계를 주도하고 있는 김보현(미국명 Po Kim·94) 화백의 고향 방문은 창녕군민들에게 많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달 25일 그가 창녕군청을 방문하자 군청에서 의전에 각별히 신경 쓰고, 신문·방송 등 취재진이 취재경쟁에 들어가는 등 창녕이 한때 들썩이기도 했다.

    김 화백은 이날 낮 조카 등 일행 3명과 함께 한 방문에서 김상신 기획감사관의 영접을 받으며 티타임과 오찬을 함께했다. 김 화백은 영접을 받으면서 창녕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낸 기억을 상기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고, 군청 공무원들은 김 화백이 기억해낸 곳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노화백의 추억을 도왔다.

    김 화백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잠시 직장을 다니던 건물을 창녕군의 안내로 찾아가며 “어릴적 기억하는 창녕과 지금의 창녕이 너무 변해 격세지감을 느끼며, 고향 곳곳의 정취를 군청의 안내로 돌아보니 너무 반갑고 고맙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체취 남아있는 고향 창녕

    김 화백은 자신을 불효자라고 했다.

    1917년 창녕에서 태어나 2살 때 대구로 잠시 옮긴 뒤 13살 때 다시 창녕으로 와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19살에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해 미술을 배운 뒤 일본 제국상업학교 편입, 메이지대학 법학공부 등 다양한 공부를 했다.

    이후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귀국해 조선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지도를 했으며,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 교환교수로 근무한 후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김 화백이 자신을 불효자라고 규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 일본으로 건너갈때 어머니는 만류했다. 어머니의 만류로 일본을 갈까말까 며칠을 고민하던 김 화백은 저 멀리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버스를 탔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뛰어나왔으나 버스에 오르는 김 화백의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다.

    또 김 화백은 조선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미국으로 갈 때 어머니에게 그냥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미국으로 간다면 또다시 어머니가 만류할 것이기 때문. 그때 어머니를 만난 것이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김 화백은 “아들이 노령의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이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어머니와의 애틋한 감정이 교차하는 듯 지난달 25일 고향 방문에서 생전 어머니가 머물렀던 도성암 곳곳을 돌아보며 회상에 젖기도 했다.



    ▲김보현 作 ‘순간을 위한 기다림’


    돈·명예보다 오로지 작품에만

    김 화백은 어릴 때부터 학교의 도화선수, 습자선수를 했다. 그만큼 그림과 글씨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대표선수로 각종 대회에 출전시켰다.

    9세에 아버지를 여윈 김 화백은 자신이 그림을 한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화가활동을 하는 형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형이 “집안에서 2명이 그림을 할 필요가 없다. 대신 문학을 하라”고 권유받았지만 김 화백은 형의 권유를 따르지 않았다.

    어머니 몰래, 형의 권유를 외면한 채 그림을 시작한 김 화백은 “그림은 나의 생이다”고 말한다. 또 그는 “예술 자체가 나의 신앙이다”고 덧붙였다.

    김 화백은 예술의 철학적 접근보다 순수예술가의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술가는 2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명성을 지향하는 직업화가이고, 또 하나는 순수예술가이다”는 김 화백은 “작가들이 눈앞의 돈보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순수예술을 항상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김 화백은 처음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먹고살아야 하고, 그림도 그려야 하는 이중적 고통에서도 돈을 벌려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명예를 좇으려고 붓을 들지 않았다. 단지 순수한 마음으로 예술을 했고, 그 예술의 내용물은 자신의 생과 자신이 그리고 싶어하는 마음속의 대상이었다. 순수예술을 추구한 화업 64년을 거치면서 돈과 명예는 자동으로 따라왔다는 것이 김 화백의 기억이다.

    김 화백은 주로 새벽에 그림을 그렸다. 깜깜한 작업실에 불을 켜고 잡념을 버리면 온전한 자신의 세계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낮보다 혼자 고민하는 새벽이 그림의 모티프를 찾기 좋았다는 노화백의 경험에서 나온 습성이다.


    ▲도성암에서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김보현 화백./조윤제기자/

     
    ‘고통과 환희의 변주곡’

    김 화백은 종종 ‘현대미술이 버린 것을 나는 되살리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새로이 관심을 가지며 그림의 내용으로 채우려고 한 문학적 주제성은 예전처럼 어떤 구체적 현실이나 상상의 표현이 아니라 작가가 살아온 세월 속에서 쌓인 잠재의식이 캔버스 앞에서의 마음과 손의 즉흥적 움직임을 따라 구체적으로 그려진 결과의 이미지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어떤 주제나 내용 전개의 구성이 없이 무엇을 그리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가운데, 캔버스를 펼쳐 놓고 오른쪽 위로부터 곧바로 화필을 놀리며 그 진행 순간순간에 착상된 현상의 그림을 자유롭게 탄생시키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이다. 그것은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 상상과 잠재의식이 즉흥적으로 교차되고 공존하는 그런 그림이다.

    그래서 김 화백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철학도, 그에 따른 어떠한 논리도 규정하지 않는다. 그런 철학과 논리가 필요없는 철저한 자유의 화가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 화백의 그림은 처음과 끝이 완전히 달라 예상이 되지 않는다. 몇 시간 화폭을 쳐다보고 붓을 놓은 적도 있고, 그림이 잘될 때는 그때 그때 느낀 대로 ‘쓱쓱’ 그림이 완성되기도 한다.

    지난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보현의 화업 60년을 돌아보는 ‘고통과 환희의 변주곡’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는데, 전시를 기획한 기혜경씨는 김보현의 화업 60년을 세 단계로 규정했다. △50~60년대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열정을 넘어’ △70년대 일상적인 정물을 극사실적으로 그려 회화의 근본문제를 제기했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80년대 이후 소품에서 벗어나 대작으로 옮겨가 자신의 기억과 상상을 통해 그린 ‘고통과 환희의 변주곡’이 그것이다.


    김보현 화백이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보현 화백이 작업을 하고 있다.



    “100살에 전시하러 고국에 다시 온다”

    김 화백은 창작의 고통은 그림을 하는 내내 따른다고 말했다. 표현의 문제로 인한 고통.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작가들의 숙명적 임무와도 같기 때문이다.

    김 화백은 “미(美)라는 것은 추구하는 것이지 도달할 수 없다. 추구하는 그 과정에서 그림이 좋아져 가는 것이지 완전한 미적 진리를 자각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물론 자신도 그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부연했다.

    그런 김 화백은 평생 그려온 자기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다. 마음에 안들어 고치기도 한단다. 작품에 대한 작가로서의 희열도 1년에 한 번도 못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작품이 완성되면 느끼는 만족은 있지만 희열은 자주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김 화백은 “희열은 작업 과정에서 느끼는 것으로, 순간적으로 찾아와 순간적으로 사라진다”면서 “그래서 희열은 연속성이 없으며 작품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연속성은 있지만 작가가 만족을 많이 하면 발전이 없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화단의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충고할 것이 없다”고 했다. 무엇이 예술가냐, 작품이냐의 관점이 지금 젊은 세대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상품이 되는 것을 상상도 못한 김 화백의 세대와 작품이 상품처럼 유통되는 세대 간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단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추구하라. 하고 싶은 것은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너무 젊었을 때 작품을 상품화하지 마라. 더 오래 작품의 진실을 추구하면 그것의 결과로 작품이 상품이 된다”고 조언했다.

    94세의 노화백은 앞으로의 인생이 기약없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이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생과 죽음 속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노화백은 6년 뒤인 100살에 고국에서 전시를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의욕을 말했다.

    김 화백은 “기약은 못하지만 100살까지 살면 서울이든, 고향 창녕이든 고국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꼭 갖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글= 조윤제기자 cho@knnews.co.kr

    사진= 김보현 아뜰리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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