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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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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27) 창원시립무용단 김효분 예술감독

“독창적 몸짓 만들기, 출산의 고통 같죠”

  • 기사입력 : 2011-07-1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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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분은 매섭고 도도한 무용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만나다 보니 덜 매섭고 덜 도도했다. 안무 지도로 바쁜 그녀를 만나 인터뷰를 하던 중,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어떤 벽 같은 것이 스르르 녹았다.

    “애 안 낳아 봤죠? 무용 창작하는 거요, 애 낳는 것 같이 아파요”라는 대목에서였다.



    ▲시립무용단과의 만남= 김효분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올해 3월 창원시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위촉되어 창원으로 내려왔다. 이전에 목포시립예술단을 맡기도 했지만, 이렇게 멀리 내려오기는 처음이다. 우려 반, 기대 반으로 무용단을 맡았다. 지금은? 대만족이란다. 부상당하는 것을 불사해 가며 열심인 단원들이 정말 자랑스럽단다.


    ▲춤과 함께 한 날들= 그녀가 자란 시절은 예능교육이 자리 잡은 시대가 아니었다. 꼬마 때부터 춤 잘 춘다는 말을 들었지만 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중학교 무용시간에 선생님 눈에 띄어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화여대와 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1970년대 중반 한국 창작무용의 산실이라 불리는 창무회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김매자 선생을 만나 10여 년간 혹독하게 춤을 배우고 창작을 했다. 너무 몸이 아프고 힘들 때는 ‘폭우가 왔으면, 폭설이 내렸으면 그래서 연습일정이 취소됐으면’ 하고 바란 날도 많았다. 가장 치열했던 날들이었고, 그녀의 춤 창작의 근간이 된 시기였다.



    ▲한번 더 접어라잉= 전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몸짓을 찾아 고심하던 그녀. 나이 서른을 넘기자 떨쳐낼 수 없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 춤에 있어서 전통이란 무엇인가’였다. 이때 찾아간 사람이 살풀이와 승무의 대가 우봉(宇峰) 이매방 선생이었다. 철저한 도제식 교육이 이어졌다. 제대로 된 춤사위가 나오지 않으면 장구채로 엄청 맞았다. 몸도 마음도 아파서 많이 울었다. 온갖 일을 제쳐두고 강습실로 달려가면 선생은 걸레 하나를 던져주며 말씀하셨다. “사분의 일로 접어라잉. 한번 더 접어라잉.” 그리고는 손바닥만 한 마룻바닥을 닦고 또 닦게 했다. 그러다 바람처럼 휘리릭, 춤 한자락씩을 가르쳐주시곤 했다. 그때 그녀는 이매방 선생 그 자체를 배웠다. 스승의 크나큰 그늘이 사랑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흥이 난다는 것= 이매방 선생 문하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과 제27호 승무를 전수받았다. 이때 ‘흥’이라는 것이 감정을 내지르듯 뿜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몸짓과 마음가짐에서 발현하는 카타르시스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이 울다 보면 평온한 때가 오잖아요? 그때 흥이 찾아옵니다. 누가 어깨춤이라도 추면 덩달아 추게 될 겁니다. 그게 바로 한국인의 흥이라고 생각해요.” 이후 고(故) 김천홍, 고(故) 박병천, 최종실 선생을 찾아가 다양한 전통춤을 사사했다. 지금도 살풀이춤이나 승무를 출 때 속으로 엉엉 운다는 그녀. 그녀와 이야기하다 보니, 흥이 난다는 것은 슬픔을 초극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속으로 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아름다움 같았다.




    ▲당신 멍청한 거 아냐?= 삼성맨과 결혼했다. 춤만 춰 온 그녀와는 사고방식의 체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매일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춤을 배우러 다니는 그녀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 “당신 멍청한 거 아냐? 선생님 춤 추시는 모습 녹화해서 모니터로 보고 따라하면 되잖아. 고생스럽게 왜 그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춤이라는 것이 그렇게 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충돌도 많았지만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며 춤추는 아내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 예스맨이 되었단다.



    ▲일주일씩 버티다= 유산을 두 번 했다. 춤을 추어 그런 것인지, 영문도 모른 채 계류유산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밀려가곤 했다. 그러다 박사과정을 밟을 때 세 번째 임신을 했다. 임신이라는 것을 알고나서부터 열 달 동안 극도로 예민해졌다. 길을 가다 산부인과 간판만 봐도 무작정 들어갔다. 초음파로 아이의 심박소리를 들어야 일주일을 견딜 수 있었다. 매일 꼭두새벽에 영어학원에 가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종일 공부만 하다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첫딸을 얻었고 이어 아들도 낳았다. 지금은 건강하게 자라 중학생, 초등학생이란다.


    ▲논개, 다시 피어나다= 그녀는 현재 단원들과 함께 다가오는 가을, 정기공연으로 올릴 ‘논개’를 준비 중이다. ‘창원시립무용단의 논개’라는, 경남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만들 욕심도 가지고 있다. 한 여성의 연인을 향한 사랑이 나라를 구하려는 대의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같은 여자로서 논개라는 한 여인의 담대함, 그 결단력에 끌리기도 했다. 구상을 하면서 ‘왜 지금 이 시대에 논개를 재조명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하여 ‘수중화(水中花)’라는 부제가 붙게 됐다. 그녀는 논개가 남강에 빠져 죽는 결말을 살짝 다른 각도로 놓아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바로 왜장을 안고 물에 빠진 논개가 물속에서 한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극적인 장면을 선보이려는 것. 자세한 설명을 주문했더니 연출가와 단원들의 무궁한 상상력을 교차시켜 끊임없이 수정하고 구성하는 중이라 세밀한 묘사는 하기가 어렵단다. 메시지를 던진 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게 있어 무용은= 그녀는 무용을 자신의 팔로 표현했다. 다른 것으로는 대체가 안 되며, 팔 하나가 없다 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늘 ‘팔이 있었으면…’ 하는 그 열망을 견디며 살아야 할 것이라고. 무용을 안해서 혹은 못해서 생길 그 열망을 다스리며 살 자신이 없다고 한다.


    ▲창작은 출산= 김효분은 작품을 만들 때마다 아이를 낳는 고통과 맞먹는 어려움을 겪는단다. 계속해서 경남지역의 문화 콘텐츠를 재조명해 독창적인 몸짓으로 풀어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그녀의, 자식 같은 작품들이 궁금하다. 무용은 상상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 그녀. 그녀만의 상상을 어서 엿보고 싶다. 창작무용 ‘논개’는 오는 10월 중순 성산아트홀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다.




    △김효분 예술감독= 1959년생.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 체육학 박사. 중요 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수원대학교 무용학과 초빙교수. 목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역임. 현재 창원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글= 김유경기자 bora@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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